이병일 씨 새 시집 '아흔아홉개…' "사물 빛나는 지점을 시어로 응축했죠"

입력 2016-05-31 17:40  

[ 양병훈 기자 ] 독창성이 돋보이는 시를 써 온 이병일 시인이 새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창비)을 냈다. 《옆구리의 발견》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자 ‘창비시선’의 399번째 시집이다.

68편의 시를 담은 이번 시집에서 이 시인은 두부·안경·구두와 같은 일상의 사물은 물론 호랑이·구렁이·펭귄·백상아리·물사슴·기린·가물치와 같은 동물, 꽃잎·풀피리·석청 등의 자연물에 의미와 빛을 부여한다. 시집에 실린 ‘피순대에 관한 기록’은 어린 시절 본 피순대를 만드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서민적 감성으로 풀어낸다.

“돼지의 멱을 따자 나온 피, 핏덩어리를 양동이에 받아놓고 할아비는 내장을 뒤집어 똥을 털어내고 소금으로 씻는다(중략) 통곡이 후련하게 터졌다가 캄캄하게 멈춘 저녁, 이웃집의 죽음 앞에서 할아비는 그 옛날처럼 돼지의 멱을 따고, 피순대를 만들고, 한입씩 물고 너덜너덜 침 흘리며 목젖 크게 웃어보는 일이 상가(喪家) 저녁이라고 했다”(이병일, ‘피순대에 관한 기록’ 부분)

‘두부의 맛’은 부드러운 두부에서 ‘힘’을 느끼는 반전이 있는 시다. 아이가 두부를 먹는 모습을 보며 말랑함 속에 단단함이 있음을 깨닫는다. “두부의 바깥은 잠잠하다 두부의 심장엔 무너지는 하얀 달이 있어 조용한 온기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중략) 잇몸 속에서 앞니가 돋아날 때, 아이는 가장 말랑한 것이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다 손톱과 발톱이 자라듯이 차가워지는 이 희끄무레한 두부 앞에서 아이는 입을 크게 벌린다”

시집 제목은 수록작 ‘나의 에덴’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홀리고 싶어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후략)”

이 시인은 “100은 정돈되고 굳어진 느낌이지만 아흔아홉은 꿈틀대는 신비로운 세계”라며 “시집에 ‘사물의 빛나는 지점’에 대한 시들을 담았다. ‘빛나는 것’이라고 하면 이 구절이 제일 먼저 생각나 시집 이름으로 붙였다”고 말했다.

이 시인은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2010년에는 일간지 신춘문예에 희곡도 당선됐다. 대산창작기금,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주문학상을 받았다. ‘시인 부부’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청년신춘문예에 ‘뇌태교의 기원’으로 당선돼 등단한 이소연 시인이 부인이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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