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다툼과 화해, 고난과 구원 사이 '십자가의 길'을 걷다

입력 2016-06-12 16:08   수정 2016-06-12 16:10

신을 갈구하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

과거와 현재, 종교와 세속이 공존하는 고도



[ 예루살렘=이두용 기자 ]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날씨. 버스 좌석 머리 위로 에어컨 바람이 뿜어져 나왔지만 미지근했다. 요르단에서 육로를 통해 이스라엘로 향하는 길. 불편한 교통과 국경에서의 지루하고 까다로운 절차. 하지만 가슴 한편에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설렘이 있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이정표가 예루살렘이 가까웠음을 알렸을 때, 마음의 불편도 설렘도 평온해졌다.

도시에 흐르는 세 종교의 숨결

요르단을 떠나 한나절,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닿았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입 안으로 날아든 텁텁하고 마른 공기. 버스터미널은 우리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적당히 시끌벅적한 소음, 승차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행렬, 크고 작은 짐을 든 사람들.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익숙한 풍경에 여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놓였다.

거리로 나서자 서로 다른 전통 복장을 한 泳宕欲?마주쳤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유대인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과 요르단에서 익히 봤던 무슬림 의상을 입은 사람들, 캐주얼을 차려입은 사람들까지 확연히 다르지만 도시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였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도시는 오랜 시간 평화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예루살렘은 불모지인 사막지대에서도 전략적인 곳에 있어 이 도시를 차지하려는 민족 간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수천 년간 이어온 도시 쟁탈전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도시를 유대교와 기독교(천주교 포함), 이슬람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했다.

길 한편에 서 있는 안내데스크에서 영어로 된 예루살렘 안내서를 하나 빼들었다. 큼지막하게 그려진 예루살렘 지도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도시의 역사와 명소에 얽힌 이야기가 쓰여 있다. 이스라엘은 국내에서 성지순례객과 배낭여행객들에게 꽤 인기 있는 곳인데 변변한 한글 안내서 하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약 3000년 전 다윗 왕이 여부스로부터 이 땅을 정복해 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유대인의 땅이 됐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들 솔로몬이 모리야산에 첫 성전을 세우고 난 뒤 이곳은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도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됐고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은 채 2000년간 세계에 흩어져 살았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뿌리가 같다. 하지만 로마 식민지 시절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예수가 이곳에서 십자가에 달리면서 예루살렘은 비로소 기독교의 성지가 됐?

무슬림에게도 예루살렘은 특별하다. 무함마드가 이곳 모리야 바위 위에서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 메카,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 성지로 꼽는다. 아랍인들은 서기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해 수 세기 동안 이곳을 통치하며 바위 돔(황금 돔)과 알 아끄사 사원을 건설했다.

이스라엘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곳과 관련한 역사책 몇 권을 섭렵하고 와도 좋겠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따라붙는 재미가 훨씬 더할 것이다.

과거를 품고 오늘을 사는 이들

예루살렘 성으로 향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나 등장할 법한 작고 예쁜 성이 앞을 막아선다. 이 성은 16세기 오스만제국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성을 중심으로 도시가 올드 시티(old city)와 뉴 시티(new city)로 나뉜다. 예루살렘은 역사와 종교의 중심 도시이기 때문에 올드 시티에 볼거리가 더 많다. 총 8개의 성문이 있는 도시 내부에는 유대인 지역과 아르메니안 지역, 크리스천 지역, 무슬림 지역이 공존하고 있다.

올드 시티의 첫인상은 과거로의 여행 같은 느낌이었다. 유대인 지역에 들어섰을 땐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방문한 듯했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에도 이들은 두꺼운 검은색 코트(카프탄)를 입고 머리엔 중절모(스타라이멜)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구레나룻(페오트)을 길러 자신들의 굳은 신앙을 표현했다.

이들은 컴퓨터와 인간이 바둑을 두는 요즘 시대에도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 한 무리의 꼬마들이 머리에 밥그

처럼 생긴 모자(키파)를 쓰고 내 앞을 지나갔다. 멜빵 바지에 남방을 챙겨 입은 모습이 앙증맞다. 깔깔거리며 떠드는 소리는 여느 나라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유대인 지역 통로를 따라서 걷다 보니 멀리 통곡의 벽이 나타났다. 헤롯왕 시절 세운 성전이 부서져 서쪽 일부만 남았다고 해서 서쪽 벽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시절에도 이곳에 모여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현재도 자신의 소원을 종이에 적어 벽에 끼우고 기도하는 유대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벽에 손을 짚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사람들과 한쪽에서 종이에 소원을 적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예루살렘에선 오랜 시간 민족과 종교 간 분쟁이 이어졌는데 통곡의 벽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들의 아픔과 눈물은 누구의 몫일까.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뉴 시티로 빠져나왔다. 잠시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거리에 즐비한 의류 브랜드 매장과 전자제품 판매점, 카페와 레스토랑 등 유럽의 거리라고 해도 믿길 정도의 풍경이 이어진다. 조금 전 본 두꺼운 전통 복장의 유대인들과 대비되는 반바지·반소매 차림의 캐주얼을 입은 사람들이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내 눈엔 훨씬 익숙한 모습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광장에선 농구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곳곳에 세워진 농구대에 서로 공을 넣겠다고 “패스!”를 연발하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건너편 거리엔 선글라스를 쓰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사람들이 보였다. 그저 평범한 일상인데 조금 전 지나쳐온 유대인 마을과 자꾸만 오버랩되면서 ‘정말 같은 도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곳에

예루살렘 성 내부가 여러 민족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걷기 위해 온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라틴어로 ‘고난의 길’을 뜻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총 14개 처소, 800m 길이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1처소부터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졌던 2처소,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처음 쓰러졌다는 3처소 등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중심으로 재판 장소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길과 십자가에 달린 곳, 돌무덤에 묻힌 장소까지 사건 흐름에 따라 동선이 연결돼 있다.

아침 일찍 비아 돌로로사로 향했다. 출발 지점에 서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주변엔 예수와 성경이야기로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상점으로 가득했다. 입구부터 길게 이어진 계단과 사방으로 뻗은 조붓한 길이 마치 미지의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예수의 시대와 현재가 만나는 교차로다.

1처소로 향했다. 예수의 십자가형이 선고된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이다. 분위기는 유럽식 가옥이 있는 마당에 들어온 듯하다. 2~9처소에서도 예수가 겪은 고난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0~14처소는 가장 꼭대기 위 성묘교회 내에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돌무덤에 묻히는 순간까지의 기록을 ?장소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뤄진 곳이기 때문에 이곳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성묘교회만을 방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찾는 이도 많아 예루살렘 최고의 명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성에서 나와 건너편 언덕으로 향했다. 이곳은 성경에 감람산으로 기록된 올리브산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곳으로, 건너편 예루살렘 성을 보며 눈물을 흘린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는 새벽까지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올리브산 정상엔 전망대가 있다. 예루살렘이 한눈에 들어와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 좋다는 숙소 주인장의 귀띔에 발걸음에 속도를 냈다. 경사가 완만해서 더운 날씨에도 지칠 정도는 아니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멀리 이슬람의 성지인 바위 돔 사원이 보인다. 흰색과 회색 일색인 건물들 사이로 화려하게 황금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라고 하기에 너무 평온하다. 사진으로 찍어도 따뜻함이 오롯이 담긴다. 예루살렘의 이름 그대로 내일은 평화의 도시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 신들이 선택한 도시인 만큼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내내 평안을 내려주길 바랐다.

예루살렘=글·사진 이두용 여행작가 sognomedi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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