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수전 기자 ]
어김없이 또 여름이다. 아이들의 방학은 다가오는데 휴가 계획은 아직 미정이다. 아내는 올 여름은 절대 ‘방콕’할 수 없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들도 “진짜 곰을 보러가고 싶다”고 조른다. 작년에 가족 해외여행을 약속했지만, 결국 동물원으로 때운 까닭이다. 사정이 이러니 그저 그런 여행으로 넘어갈 순 없는 노릇. 특별한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무심히 TV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던 아내가 말한다. “옐로스톤은 어때요?”
옐로스톤이라면 전 세계 제1호 국립공원 아닌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원. 1978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미국 와이오밍, 몬태나, 아이다호 3개 주에 걸쳐 있는 9000㎢의 드넓은 공원 지역에는 강과 호수, 산과 숲, 간헐천, 폭포, 기암괴석, 야생동물이 여행가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올해는 미국이 국립공원을 지정한 지 100주년 되는 해다.
한 폭의 수묵화, 그랜드티톤
여행의 시작은 와이오밍주의 작은 도시 잭슨이다. 이 튿袖未銖?타운은 그랜드티톤국립공원과 옐로스톤국립공원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베이스 기지다. 일단 자동차부터 빌린다. 잭슨홀 공항에서 잭슨 시내 렌터카센터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다닌다. 이곳 렌터카는 앞뒤 번호판이 모두 없는 게 특징이다. 그랜드티톤국립공원에 가기 전, 잭슨홀방문자센터에 들러 여행 정보를 수집한다. 이 센터에서는 망원경으로 엘크 보호구역을 둘러볼 수 있다. 겨울철이면 먹이를 찾아 보호구역으로 몰려오는 엘크 떼를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차량은 북쪽으로 내달린다. 끝이 안 보이는 대평원이 여행객을 반긴다. 그랜드티톤국립공원 입구에서 입장권을 산다. 1주일권이 차량 1대당 50달러. 그랜드티톤과 옐로스톤 두 공원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공원에 들어서자 우뚝 솟은 티톤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탄성이 쏟아진다.
길 가는 곳곳이 사진 찍는 포인트지만, 티톤 산맥을 가장 예쁘게 담기 위해 과거 후기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몰몬교) 사람들이 거주했던 ‘몰몬 로우’로 향한다. 엽서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녹색 지붕의 오두막집 위로 하얀 만년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고즈넉한 그 모습에 겸재 정선의 수묵화가 떠오른다.
다시 북쪽으로 티톤 파크 로드를 20㎞ 남짓 달린다. 거울처럼 투명한 제니 호수와 맞닥뜨린다. 1인당 9달러를 내면 호수 반대편까지 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반대편 선착장엔 작은 폭포를 볼 수 있는 하이킹 코스가 있는데, 보트 운전사는 “오후 5시 마지막 배를 놓치면 2시간을 걸어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간다. 공원 내 잭슨레이크롯지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한국으로 치면 콘도보다는 작고 산장보다는 큰 규모다. 1박에 150~200달러 정도로 6월부터는 성수기여서 조금 더 비싸다. 잭슨레이크롯지의 로비 뒤쪽 편엔 티톤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벤치에 앉아 낙조로 발갛게 물들어가는 티톤 산맥을 보니 절로 가슴이 뭉클하다.
옐로스톤 ‘8자 코스’를 탐험하라
다음날 차는 다시 북쪽으로 달린다. 그랜드티톤국립공원을 벗어나면 바로 옐로스톤국립공원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의 공원 관리인이 지도와 함께 ‘야생동물 조심’이라는 팸플릿을 건넨다. ‘곰이나 늑대와 같은 동물과 최소 91m 거리를 유지하라’는 경고문이다. 뭔가 긴장되면서 이제야 진짜 ‘야생’에 들어선 기분이다. 공원 이름만 바뀐 것 같은데도 주변 환경이 서서히 달라진다. 어디를 가도 티톤 산맥이 너른 풍경을 꽉 채우던 그랜드티톤과 달리, 옐로스톤은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처럼 강렬하다.
옐로스톤은 크게 8개 지역으로 나뉜다. 남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레이크 컨트리, 캐니언 컨트리, 루스벨트 컨트리, 매머드 컨트리, 가이저 컨트리다. 대부분의 볼거리는 지역별 인포메이션센터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이 5개 지역은 8자 형태의 도로로 연결돼 있어 ㈖?전에 동선을 미리 짜 두는 게 효율적이다. 우선 옐로스톤 동쪽에 자리 잡은 피싱브리지로 향한다. 도로 오른편에 공원에서 가장 큰 호수인 옐로스톤호수가 투명한 속살을 드러낸다. 구름이 하늘에 있는지, 물 위에 떠 있는지 지평선만이 구분해줄 뿐이다.
다음 목적지는 옐로스톤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인 로어(lower) 폭포다. ‘아티스트 포인트’라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로어 폭포는 높이 93m의 위용을 드러낸다. 노란 물감을 바위에 풀어놓은 듯한 절벽 틈새로 분당 850만L의 물이 쏟아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었지만 폭포 아래로 가는 트레킹 코스가 폐쇄돼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다.
여름날의 곰을 좋아하십니까
풍경을 실컷 감상했으니 이젠 ‘진짜 야생’을 체험할 차례다. 옐로스톤은 곰, 늑대, 엘크, 바이슨, 물수리, 코요테 등 희귀한 야생동물의 천국이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어슬렁대는 커다란 덩치의 녀석과 마주치게 된다. 흔히 버팔로, 미국에선 바이슨이라고 불리는 들소다. 멀리서 볼 때는 풀을 뜯는 모습이 한국의 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녀석이 도로를 점거하고 쿵쿵 자동차를 향해 뛰어오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행히 차를 비켜 지나갔지만 그 우람한 몸집과 커다란 숨소리가 “나 만만하게 보지마”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공원 곳곳엔 바이슨, 엘크와 같은 초식동물이라도 23m 이상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한다. 바이슨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을 경우 2차로인 공원 도로에서 차량이 오도가도 못하고 멈추는데, 때로는 1시간 이상 교통정체를 겪을 수 있다.
‘공원 사파리’의 하이라이트는 곰이다. 루스벨트 지역에서 공원 동북쪽 입구로 향하면 라마 밸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지역은 옐로스톤에서 가장 쉽게 야생동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라마 밸리를 10여분 달렸을까, 도로변에 주차된 차들과 사람들이 무언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궁금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서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와서 보세요, 곰이에요.”
곰이라는 말에 바로 고개를 돌려 풀숲을 살펴본다. 검은 물체가 움찔움찔 움직인다. 갈색 곰인 그리즐리 베어와 함께 옐로스톤에 서식하는 블랙 베어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몸집이지만 공원 입구에서 받아 본 경고문에 몸이 움츠러든다. 아무리 봐도 거리가 90m보다 훨씬 가깝다. 관중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태연하게 앞발로 땅을 헤치며 킁킁댄다. 맹수라는 사실만 잊으면 귀엽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이 황홀한 조우를 만끽한다.
옐로스톤의 또 다른 스타, 늑대를 보려면 망원경이 필수다. 루스벨트 지역 슬루크릭 캠프지로 들어가는 길에서 한 무리의 ‘늑대 팬’들을 만났다. ‘옐로스톤 사파리 컴퍼니’란 문구가 등에 새겨진 갈색 점퍼를 입은 백인 남자가 5㎞는 떨어져 보이는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저곳에 늑대굴이 있어요”라고 알려준다. 친절하게도 망원경 자리까지 내줘 바라보니 저 너머 점처럼 보이던 나무가 바로 코앞 甄? 이 정도면 늑대의 솜털까지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20여분을 기다려도 늑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몇 시간은 기다려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사파리 직원의 말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돌아선다.
신들의 온천, 노리스
매머드 지역에 들어서니 비릿한 유황 냄새가 풍겨온다. 옐로스톤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간헐천이다. 간헐천이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를 뿜어내는 온천이다. 옐로스톤은 수십만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고원 지대인 데다 마그마가 지표에서 가까운 5㎞ 깊이에 있어, 크고 작은 간헐천이 300여개 분포하고 있다.
다양한 온천이 모여 있는 메인테라스와 로어테라스는 매머드 지역의 중심이 되는 장소다. 과거엔 활발히 온천수를 뿜어냈지만 1990년대부터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회색빛 석회암 계단의 흔적만 남아 있어 온통 소금을 뿌린 듯 하얗다. 계단식 석회층을 따라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거대한 캐네리스프링 만이 진풍경을 연출한다.
좀 더 멋진 간헐천을 보기 위해 남쪽으로 30여㎞ 떨어진 노리스로 간다. 노리스 간헐천 지대는 곳곳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신들의 야외 온천에 온 듯 몽환적이다. 파도처럼 “솨솨” 소리를 내는 연기 사이를 지나면 곳곳에 초록, 노랑, 파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온천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온천의 색이 겹겹이 다른 이유는 물의 온도 때문이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워서 미생물이 죽기 때문에 물색이 맑고 투명해진다. 초록색은 40~50도, 주황색은 50~60도 정도다. 가장 안쪽의 파란색 부분은 100도 이상 끓어오른다. 이 때문에 간헐천 주변엔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달려 있다.
세계 최고 높이로 분출하는 스팀보트 가이저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한 번 분출하면 90m까지 솟아오르며, 짧게는 며칠 만에 터지고 길게는 50년까지도 침묵한다. 이곳에서 간헐천이 터지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로또를 한 번 사보는 건 어떨까.
땅 위에 핀 무지개 꽃, 모닝글로리
간헐천 탐방의 ‘투톱’을 보기 위해 가이저 지역으로 향한다. 공원에서 가장 큰 온천인 그랜드프리즈매틱 스프링은 옐로스톤을 소개하는 사진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지름 113m로 가까이에서 보면 호수처럼 거대해서 이름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한눈에 보기 쉽지 않다.
실제로 홍보용 그랜드프리즈매틱 스프링 사진은 대부분 하늘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올드페이스풀 가이저는 훨씬 극적이다. 분출할 때마다 30~55m 높이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 양이 최대 3만L에 달한다. 45~120분 간격으로 분출하며 근처 안내판에서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준다. 이미 사람들이 공연을 보듯 간헐천 주변을 빙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콰르릉!” 물줄기가 터져 나오자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사방을 메운다.
다음날 아침 산책 겸 올드페이스풀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는다. 크고 작은 온천을 지나 40여분 걸었을까. 길의 끝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빛 온천이 햇살처럼 여행객을 맞는다. 주황에서 시작해 노랑·초록·에메랄드 색으로 이어지는 영롱한 물빛. 이름도 ‘모닝글로리’라니, 누군가 기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스친다.
올드페이스풀 가이저 바로 옆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올드페이스풀인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금방이라도 해리 포터가 튀어나올 듯한 이 건물은 전부 옐로스톤의 통나무를 사용해 지었다. 숙박하려면 최소 6개월 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2층 야외 테라스에선 올드페이스풀 가이저가 분출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맥주 한 병 사들고 ‘간헐천 쇼’를 구경하기엔 그만이다. 날이 어둑해지자 여관 테라스에 피아노와 첼로 연주가 울려 퍼진다. 한쪽에선 아버지와 아들이 친구처럼 마주 앉아 보드게임에 빠져 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은하수가 펼쳐진다. 이곳의 별은 가족들과 보면 더 빛날 것 같다. 옐로스톤의 밤이 깊어간다.
옐로스톤=백수전 기자 jerry@hankyung.com
취재 협조=미국관광청(http://www.gousa.or.kr/)
맛있는 초대
▷퍼스폰 베이커리=잭슨 시내에 있는 모던한 분위기의 브런치 카페. 메뉴 가격은 10~12달러 정도. 샌드위치, 오믈렛, 커피 모두 훌륭하다.
▷잭슨레이크롯지 레스토랑=그랜드티톤국립공원의 잭슨레 謙㈆讀熾?있다. 그랜드티톤 산맥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으로 엘크 고기를 맛볼 수 있다. 메뉴는 30~40달러 선. 아침엔 조식 뷔페도 판다.
▷스노롯지 레스토랑=옐로스톤국립공원의 스노롯지에 있다. 안심 스테이크, 바이슨 립이 먹을 만하다. 가격도 20~30달러 선으로 합리적이다.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