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는 무력으로 빌헬름 1세에게 제2제국 황제의 관을, 독일 국민은 선거로 히틀러에게 제3제국 총통의 권위를 선사했다.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인생의 끝은 달랐지만 제국의 종착지는 같았다. 프랑스로 진격, 러시아로의 동진이다. 독일의 통합을 두려워한 이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마가렛 대처 총리는 하나된 독일을 경계했고,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은 통일 독일에 견제하기 위해 유럽통합을 제시한다. 하나된 유럽은 하나된 독일의 공포에서 출발했다.
대처가 맞고, 미테랑이 틀렸다. 이제 유럽의 독일(European Germany)이 아닌 독일의 유럽(German Europe)이다. 독일 제4제국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독일이 부채로 다른 EU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프라스는 그렉시트(Grexit)로 저항했지만, 결국 독일에 굴복했다. 독일의 배후지는 유럽연합(EU)이다. 단일 통화인 유로화 도입은 ‘신의 한 수’였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내에서 흑자국 독일과 적자국들 간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재정불균형은 독일을 살찌웠고, 독일은 인플레이션의 공포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영국은 이에 저항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지난 2월 다보스 포럼에서 EU의 과도한 규제와 관료주의를 비난했다. 규제와 관료주의는 독일의 질서이다. 물론 브렉시트(Brexit)를 무기로 캐머런 전 총리는 EU에서 영국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EU가 대폭 양보를 통해 브렉시트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EU는 분노했고, 독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특권이 선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 통화정책을 원하는 국가들의 욕구도 잠재워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브렉시트 이후 EU는 분열보다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두 여성, 테리사 메이와 앙겔라 메르켈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메이의 취임 일성은 “브렉시트 번복은 없다”였다. 게르만과 앵글로색슨 경제의 충돌, 사회적 시장경제와 대처리즘의 불완전한 동거는 이별로 마감했다. 영국은 오래도록 지켜온 영광의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브렉시트는 역사의 반복일 뿐이다.
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다음 세 가지 수순을 예측 가능하게 한다.
첫째, 독일은 동진한다. 하나된 독일은 러시아로 전진했다. 단 1,2차 세계대전과 달리 이제 영토가 아닌 경제권의 확장이다 지정학(geo-politics)이 아닌 지경학(geo-economics)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나간 EU의 남은 자리를 옛 소련 연방, 조지아나 우크라이나가 대체할 수 있다.
둘째, 독일은 앵글로색슨이 아닌 라틴(스페인과 이탈리아)과의 협력으로 패권을 유지할 것이다. 이미 우호적 변화도 나타났다. 이탈리아 은행권의 부실채권 처리 방법이다. 이탈리아 은행에 대한 ‘익스포저’(손실 발생 가능액)는 독일이 100조원, 프랑스는 290조원에 달한 ? 이미 콘스탄치오 ECB 부총재는 긴급구제(Bail-out)를 허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시기라고 밝혔다. 독일이 강력히 고수해 온, EU의 채권자 손실부담(Bail-in) 원칙이 후퇴한 것이다.
세 번째는 아시아의 부상이다. 통일 독일은 영미와 싸웠고, 아시아와 협력했다. EU 유럽의회는 지난 5월 중국의 MES(Market Economy Status)지위 부여를 반대했다. EU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국 MES를 반대하고, 중국의 구조조정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독일은 중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처머니’(중국과 독일· Chemany)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아이러니하다. 브렉시트 직후 만연했던 흑조(블랙스완)의 공포는 잠잠해지고, 금융시장은 위기 이전의 허들을 넘어섰다. 위기가 출현하자 이를 조기 봉합하기 위한 글로벌 공조가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정책공조는 인플레 기대의 불씨를 살려냈고, 그 불씨가 불길로 번지고 있다. 주식, 하이일드 채권, 상품 등 모든 자산이 들썩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주가는 현실보다 앞서 움직인다.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estrategy@ebests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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