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시기 정해놓고 노사교섭은 시늉
정부는 사후 엄포만
노동조합의 파업권, 즉 단체행동권은 본질적으로 단체교섭권을 전제로 한다. 노사가 근로조건을 놓고 교섭을 벌이다가 도저히 의견 차이를 해소하기 어려울 때 노조는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다. 파업이 시작되면 노조원은 임금 손실, 기업은 생산 차질 등의 피해를 입는다. 미국 노동관계법이 파업을 ‘최후의 수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한국 노동법도 파업은 목적·절차·수단이 적법해야 한다고 엄격한 제약을 두고 있다.
대기업 노사는 이런 교과서적 내용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조는 미리 정해 놓은 시기에 맞춰 파업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을 하고 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는 등 겉모양새에 적법성을 갖춘다.
특히 특정시기에 파업을 집중하는 ‘시기집중파업’을 앞두고 노조는 회사 측과 ‘형식적인’ 교섭에 나선다. 상급단체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날짜에 파업하기 위해 소속 노조나 지부들이 ‘적당히’ 교섭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노조는 교섭시기 ?횟수, 절차 등을 적절히 조절해 합법적으로 ‘파업권’을 확보한다.
사용자 측도 연례파업이나 정치파업을 자주 겪다 보니 미리 생산물량을 조절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비한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다 보니 상습적이고 연례적인 파업에 감독 당국은 물론 노사 양측이 정당성 측면에서 다소 둔감해졌다.
노사 양 당사자 간 교섭으로 한정해본다면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삼지 않고 넘길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조선·자동차 업종은 수많은 협력업체와 부품업체가 얽혀 복잡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조선·자동차업종에서 완성품 업체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 차질이 발생하면 협력·부품업체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손실을 보상받을 길도 없다. 원청업체 근로자들은 파업에 따른 임금손실분을 나중에 ‘타결격려금’이나 ‘위로금’ 등의 명목으로 보상받는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연례 파업을 벌이지만 임단협 교섭 타결 후엔 기본급 인상, 성과급 지급 외에도 일시금이나 격려금 등을 받는다. 일시금 액수는 2012년 이후 700만~900만원대에 이른다. 부품·협력업체 근로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들은 완성품 업체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이 어려워지면 무급휴가를 가야 하는 등 과실은커녕 손실만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불황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 여파로 조선업 등을 기반으로 하는 특정 지역의 실업률이 치솟고 있다. 청년 실업률도 매달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협력업체 노사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기업 노조의 이기적, 불법적 파업 행태는 더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의 형식적인 엄포나 미온적 대처가 비난을 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최종석 노동전문위원 jsc@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