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은 임기의 절반을 넘기면서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을 걱정했다. 5년 단임제에서 레임덕은 필연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레임덕을 피해 간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었다.
레임덕은 소리 없이 오지만 나름 공식이 있다. 세 단계를 거친다. 여권 내부에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1단계다. 레임덕의 신호탄이다. 2단계에서는 여권 핵심이 공유하는 고급 정보가 야당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정권 교체에 대비해 공직자들이 야당에 줄을 대는 단계다. 측근 비리로 국정 동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마지막 단계다.
단임제서 레임덕은 필연적
김영삼(YS)·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은 3단계를 모두 거쳤다. YS는 임기 말에 차남 현철씨가 구속되면서 사실상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DJ도 홍업 홍걸 등 두 아들의 구속으로 정국 주도권을 잃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형님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지켜봐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임기 말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힘이 빠졌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김무성 전 대표는 2014년 10월 개헌론을 제기 杉? 개헌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함구령이 나온 지 열흘 만이었다.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지만, 김 전 대표가 ‘꼬리’를 내리면서 갈등은 봉합됐다. 이때까지 레임덕의 징후는 없었다.
여권 내부 반기의 신호탄은 지난해 7월 ‘국회법 파동’이다. 중심엔 복당한 유승민 의원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를 ‘허구’라고 공격하며 한 차례 대립각을 세운 유 의원은 7월에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 심사권을 강화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 통과를 주도했다. 격노한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배신의 정치’라는 말은 이때 나왔다.
유 의원은 물러나면서까지 헌법의 가치를 강조하며 각을 세웠다. 올 3월 공천 갈등 때 돌발한 ‘옥새파동’과 총선 후 쏟아진 비박(비박근혜)계의 당청 쇄신론은 이의 연장선상이다.
우 수석 ‘정치적 책임’져야
어떤 대통령도 레임덕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레임덕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현 정부 상황을 ‘3단계 레임덕’론에 대입해 보면 적어도 1단계는 지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각종 비리 의혹에 대한 청와대 대응도 어쩌면 레임덕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코너에 몰린 우 수석에게 “고난을 벗 삼아 소신을 지키자”며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우 수석은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측근이다. 청와대는 우 수석이 물러나는 것 자체가 비리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돼 레임덕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것 같다. 여전히 정면 돌파론에 무게가 퓔?분위기다.
청와대의 이런 생각은 민심과는 동떨어져 있다. 의혹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우 수석이 자리를 지킨다 해도 정상 업무를 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는 공직자로서 신뢰를 잃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의 국정운영 부담만 커질 뿐이다. 레임덕 차단이라는 의도와는 거꾸로 레임덕이 가속화하는 상황을 맞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우 수석도 이를 원치 않을 것이다. 우 수석은 법적 책임과 분리해 정치적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매듭을 풀어야 한다. 이것이 대통령을 돕는 최선책이다.
이재창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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