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천리안처럼
"9·11사태 같은 테러 막자"
빅데이터의 힘, 공익에 활용위해
정보분석 프로그램 '고담' 개발
CIA서 200만불 투자 유치
폰지 사기·마약조직 소탕 등
대형 범죄 적발에 큰 역할
FBI 등 미국 12개 기관이 사용
JP모간 등 대형기업들도 고객
철학박사 출신 사업가
자산 16억달러 부호이지만
보라색 바지에 ‘폭탄 머리’
집도 차도 없는 ‘자유분방’ CEO
[ 박진우 기자 ] 2008년 12월11일. 미국에서 희대의 다단계 금융사기가 정체를 드러냈다. 피해 규모는 최소 500억달러(약 57조원). 범인은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지낸 버나드 메이포드였다. 그는 1960년 버나드메이도프증권회사를 설립해 이른바 ‘폰지 사기’를 저질렀다. 폰지 사기란 신규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 기존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금융범죄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성이 없고 다수의 최종 투자자가 돈을 잃는 구조다. 메이포드는 연 8~10%의 수익률을 제시하며 수십년간 세계에서 자금을 끌어들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사기극을 밝혀내기 위해 분석해야 했던 자료는 20테라바이트(2만480기가바이트)에 이른다. 500페이지짜리 책(1메가바이트)으로 따지면 2000만권이 넘는 분량이다. 방대한 자료지만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프로그램은 2시간 만에 분석해냈다. 알렉스 카프 최고경영자(CEO·49)가 운영하는 팔란티르(Palantir)라는 회사였다.
빅데이터 분석 기업인 팔란티르는 지난해 민간부문 계약 규모만 17억달러(약 2조원)를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업 가치는 200억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리스트에서 우버(자동차 공유), 샤오미(전자제품 제조), 에어비앤비(숙박 공유)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기업 가치를 자랑한다.
9·11사태과 같은 테러 막기 위해 창립
카프가 팔란티르를 세우게 된 계기는 2001년 9·11테러를 겪으면서다. 카프는 4명의 공동창업자들과 함께 9·11사태와 같은 테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2004년 팔란티르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인 팔란티르는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천리안의 능력을 가진 돌이다. 카프 CEO 등 공동창업자 다섯 명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빅데이터의 힘을 공익에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팔란티르를 회사 이름으로 지었다. 카프는 지금도 “우리 회사의 주된 목적은 ‘샤이어’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샤이어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고향으로 테러에 직면한 미국과 동맹국들을 빗대 표현한 것이다. 카프 CEO는 채용한 신입 엔지니어들에게도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줄 순 있지만 돈으로 보상받기 위해 오는 곳은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팔란티르에서는 세일즈맨 대신 엔지니어들을 고객 앞에 내세우는 특이한 판매방법을 택하고 있다. ‘자기가 개발한 제품도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이뤄진 회사는 믿을 수 없다’는 카프의 믿음 때문이다. 공익을 추구하는 정보기술(IT) 기업인 만큼 신뢰받을 수 있는 엔지니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최고의 정보분석 프로그램”
2004년 창업 당시 카프 CEO는 서류 숫자 등으로 분석하기 쉽게 정리된 정보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이메일까지 일정한 형식 없이 생산되는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데이터들의 연관성을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게 찾아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소프트웨어가 있다면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프와 공동창업자들은 2005년부터 3년간 ‘고담’ 프로그램에 집중했다. 2008년 완성된 고담은 1페타바이트(100만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일반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알려주는 소프트웨어다. 정보분석가들은 최고의 정보분석 도구라는 평가를 내놨고 군사작전, 해커 추적, 약품 효능분석 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2011년 미국 연방마약단속국(DEA)이 대형 마약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도 고담 덕분이다. DEA는 고담으로 마약 조직원, 자금 유통경로, 마약 중독자, 정보원 보고서, 감청 자료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했고 핵심인물들의 거주지와 주요 활동지역, 자금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고담 개발에는 카프 CEO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담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민간 투자가는 없었다. 카프 CEO는 2001년 발생한 9·11테러 조직의 실체를 밝히려는 중앙정보국(CIA)에 주목했고, CIA의 자회사 인큐텔에서 200만달러의 자금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3년간 보름에 한 번씩 서부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본사에서 동부 워싱턴DC CIA 본부를 오가며 고담을 개발했다. 상품화에 대한 압박이 심했지만 개발 속도보다는 제품의 완성도에 집중했다.
완성된 고담은 기밀정보 때문에 마케팅할 수 없었지만 뛰어난 품질 덕에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었다. 올초 미국 인터넷 매체 버즈피드가 확인한 팔란티르의 내부문서에 따르면 특수전사령부, 질병예방통제센터(CD), 국토안전부(DHS) 등 미국 내에서만 최소 12개 기관이 고담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실종아동센터(NCMEC)에서 미아를 찾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JP모간 등 대형 금융사를 비롯해 식품·법률회사들도 팔란티르의 고객이다. 팔란티르는 지난해 매출의 75%가 민간기업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돈에 얽매이지 않는 철학자 CEO
카프 CEO는 원래 사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거부하는 ‘히피’ 성향의 부모 아래서 자라났다. 부모의 성향을 따라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의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 문하에서 신(新)마르크스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으며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카프는 학계를 떠난 직후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취미 삼아 투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곧 투자에서 소질을 발휘했고, 유럽의 억만장자들이 돈을 맡기는 매니저로 승 쩜掠맨玖?2002년 캐드먼그룹이라는 자금관리회사를 설립했다. 투자회사 매니저 경력은 평균 나이가 22세에 불과했던 공동창업자들을 대신해 CIA로부터 자금을 받아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경력들 덕에 지금도 그는 팔란티르 사내에서 ‘카프 박사’로 불리며 정신적 지주로 ‘숭배’받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자산총액 16억달러의 부호가 된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엔 자유분방함이 녹아있다. 그는 소유한 집도 차도 없다. 차를 운전할 줄 몰라 걸어서 출퇴근한다. 그는 보라색 바지와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이른바 ‘폭탄 머리’를 지닌 자유분방한 CEO다.
팔란티르의 고객사인 국가대테러센터(NCTC)의 마이클 라이터 전 소장은 “(팔란티르 계약 미팅에 참석한) 카프의 머리나 옷은 나와 그 회의에 와 있던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와 팔란티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지금 라이터 전 소장은 팔란티르의 컨설턴트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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