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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지식사회부 기자) 약해 보이기만 했던 여대생들이 그리 강단있을 줄 생각 못했습니다. 벌써 일주일 넘게 학교 본관을 점거하고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에 관한 얘기입니다. 애초 농성의 빌미가 됐던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 신설을 백지화했는데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입니다. 이번엔 학교의 수장인 총장을 물러나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이쯤되면 강단을 넘어 고집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 무엇이 이토록 학생들을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합니다만, 이대 학생들의 ‘분노’는 대학졸업장의 손익계산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그것도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어렵사리 따낸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우려 말입니다.
대학졸업장을 상품이라고 가정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상품을 만들기 위해 생산자인 학생은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선 한 학기에 600만원 안팎의 등록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장학금을 제외한 명목 등록금은 900만원에 육박합니다. 그나마 부모님이 책임져 주면 다행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은행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출 이자는 연 2.5%입니다.
졸업장을 장식할 스펙을 쌓기 위해 들인 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해외 어학연수에다 각종 학원비 등도 원가에 반영돼야 합니다. 여기에 무형의 비용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6년간 밤잠 참아가며 투자한 시간은 기본이고, 인생의 황금기인 대학 시절 오로지 좋은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도서관에서 보낸던 열정도 졸업장이란 상품에 녹아들어 있는 투입비용입니다.
졸업장이란 상품을 만들었다면 이제 이를 비싼 값에 팔아야 합니다. 가장 흔한 경로가 취업입니다. 기업은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는 지, 어느 대학의 졸업장인 지 등을 감안해 채용을 하고 임금을 결정합니다. 대학 졸업장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예컨데 대학 숫자가 워낙 적었고, 그마저도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1960년대라면 명문대건 아니건간에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투입 원가 대비 언제든 비싼 값에 물건을 팔 수 있으니 손익계산서는 당연히 흑자입니다.
하지만 4년제 대학이 203개에 달할 정도로 대학 숫자가 늘어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 나온 상품의 숫자가 너무 많아진 겁니다. 간단한 수요공급의 원칙만 감안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졸업장의 가치는 곤두박질치는 중입니다. 실제 한국의 2013~2015년 25~35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이 68%로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선진국들과 견줘봐도 한국이 대학졸업장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다는 얘기입니다.
높은 교육열 덕분이긴 한데 대학 졸업자 입장에선 웃을 일은 아닙니다. 같은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은 대학졸업장을 임금으로 환산한 가치가 가장 낮습니다. 예컨데 고졸 졸업자의 임금을 100으로 가정하면 한국에선 대학졸업자의 임금이 110에 불과합니다. OECD 평균은 125인데 말이죠.
이번 ‘이대 사태’는 대학 졸업장의 가치 하락 현상이 명문대로까지 번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성 학생들과 이에 동조하는 분들이 여러 주장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들 주장의 핵심은 ‘내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져선 안된다’ 입니다. 이런 현상은 투자비용이 많을수록,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가 더 어려워질수록 심해질 겁니다. 경기 및 취업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경기가 앞으로도 썩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떻할까요? 이대로 우리는 급락하는 졸업장이란 상품의 가치를 최대한 부여잡고 있어야 할까요. 앞서 얘기한 졸업장 가치 하락의 원인을 감안하면 유일한 해결책은 대학 졸업장의 공급을 줄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 고3 졸업생들이 너도나도 대학에 진학할 게 아니라 취업 등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대학 신입생 중 25세 미만의 비중인데요. 한국은 89%인데 비해 노르웨이는 38%에 불과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로 꼽히는 노르웨이의 대학 ‘새내기’들 중 60% 가량이 26세 이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선취업·후진학 학생들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뭔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 대학이란 고등교육 기관으로 다시 들어온 이들입니다.
노르웨이는 인구가 적긴 하지만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나라입니다. 25~35세 고등교육 이수율은 50% 내외로 한국에 비해 낮습니다만, 55~6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이 OECD 최상위 수준입니다. ?기준에서 OECD 평균은 25%인데 한국은 17%로 최하위권입니다. 결국 노르웨이는 한국만큼 대학 졸업장을 갖는 이들이 많긴 한데 대학 입학을 고3 졸업 직후가 아니라 26세 이후에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진학과 선취업·후진학의 차이인 셈이죠.
대학입학의 연령대가 노르웨이처럼 다양해지면 취업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3 졸업 직후에 대학에 입학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이들간의 경쟁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졸업장의 가치가 올라가는 거죠. 게다가 이들이 선택하게 될 직장은 아마도 육체 노동보다는 정신 노동에 가깝고, 단순반복에 관한 일이라기보단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일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학 졸업장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대학 입학을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겁니다. 그 중 핵심이 평생대학 개념입니다. 고교 졸업 직후엔 여러 사정상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직업을 잡았지만 좀 더 직무능력을 높이기 위해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발생할 때 언제든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번 ‘이대 사태’를 계기로 한국도 노르웨이식의 교육 구조로 변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끝) / donghuip@hankyung.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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