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생명경시풍조 고발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절망, 더 큰 이해심으로 껴안아야
[ 유재혁 기자 ] 세일즈맨 정수가 자동차를 타고 강원도 터널을 통과하던 중 붕괴 사고로 흙, 바위와 콘크리트 더미에 묻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에게는 배터리 잔량 78%의 휴대폰과 생수 두 병, 딸에게 주려고 산 생일 케이크가 있다. 바깥에서 구조작업이 시작됐지만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정수 역을 맡은 하정우(38·사진)가 10일 개봉하는 ‘터널’(감독 김성훈)에서 3년 전 흥행작 ‘더 테러 라이브’에 이어 또 한 번 ‘1인 재난극’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영화에는 재난의 공포뿐 아니라 적당한 유머, 사회 비판 메시지까지 풍성하게 녹아 있다. 서울 팔판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시사회 관객들의 호응이 커서 다행입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잘 살아났어요. 오달수 형(소방관 역)은 완성작을 보면서 계속 울더군요.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뜻일 겁니다. 눈물은 이해심의 찌꺼기 아닐까요? 이 영화는 재난 상황과 마주친 사람들의 다양 ?입장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겁니다.”
그는 정수를 구하려다 사고로 죽는 구조작업반 인부의 노모(老母)가 정수 아내(배두나 분)에게 달걀을 던지는 장면을 예로 들었다. 아내가 “죄송합니다”라며 사과하자 노모는 주저앉아 울고 만다. 노모도 정수의 아내가 아들 죽음의 책임자가 아니란 사실을 안다. 하정우는 “재난 상황에서는 각자 처지가 다르지만 더 큰마음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는 메시지를 영화는 던져준다”고 설명했다.
정수는 터널 속에서 찌그러진 차 안을 거점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또 다른 생존자와 개를 만나 위로해 준다. 하정우는 잘나가는 앵커를 연기한 더 테러 라이브에서는 슈트를 빼입은 채 피를 흘렸지만, 여기서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돌바닥을 기어 다닌다.
“애드리브(즉흥) 연기 장면이 100여가지나 됩니다. 제가 여러 가지 버전을 연기한 뒤 감독이 좋은 장면을 선택하도록 했어요.”
영화는 무엇보다 개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대충 제작한 설계도, 부실 시공한 터널, 의전에 급급한 정부 관계자들, 회의만 하는 윗사람들, 언론의 과잉 경쟁 보도 등은 관객을 씁쓸하게 한다.
하정우는 화가로도 활동하는 대표적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는 “그림을 얘기하기는 것은 전업작가들에게 미안하고 쑥스럽다”며 “유명세로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을 판 수익금은 대부분 개안수술을 하는 어린이에게 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전전할 때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붓을 들었다. 스케치북을 사서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잘 갔다. 재미도 있고, 편안해졌다. 화가에 관한 영화들을 찾아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유명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실력을 쌓았다.
“연기는 협업인데, 그림은 나만의 것이에요. 그림은 마음의 거울 같아서 감정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제 그림을 볼 때 가끔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어요. 그런데 다른 이들한테는 느낌을 준답니다. 저는 만족스러운 그림이 다른 사람에겐 아무 느낌을 주지 못하기도 하고요. 스트레스가 많을 때 그린 그림에는 날이 서 있어요. 그림을 보면서 제 감정상태를 알아보는 게 재미있습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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