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유감] "너 때문에 졌다" … 축제에서 '전범' 찾는 사회

입력 2016-08-22 13:58   수정 2016-10-26 22:22


“도대체 어떻게 국가대표가 됐냐?”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 배구 8강전. 40년 만의 메달 도전이 실패로 끝난 직후 포털 사이트에 비난 글이 쏟아졌다. 박정아 선수(IBK기업은행) 등을 겨냥한 악성 댓글이 많았다.

한국 배구 대표팀에 많은 숙제를 남긴 경기였다. 고질적 문제였던 수비 불안이 속출했다. 리베로 김해란(KGC인삼공사)조차 연속 리시브 범실을 할 만큼 네덜란드의 서브는 변화무쌍했다. 수비가 흔들리자 김연경(페네르바체)의 오픈 공격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몰빵 배구’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쉬운 8강 상대로 지목했던 네덜란드에 발목을 잡힌 이유다.

이날 경기 결과를 놓고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패전의 멍에를 씌울 느닷없는 ‘전범 색출 작업’이 벌어진 것. 지목된 타깃은 박정아 선수였다. 박정아는 이 경기에서 16개의 범실을 기록했다. 절반은 공격에서 나온 범실이지만 리시브 정확도가 16%에 불과할 만큼 수비에서 잔실수가 많았다. 특히 4세트 막판 매치 포인트가 된 리시브 범실이 컸다. 추격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박정아는 완전히 '마녀'로 몰렸다.

경기 다음날인 17일 오후까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엔 박정아의 이름이 올랐다. 기사 댓글마다 비난이 이어졌다.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은 물론 수위가 지나친 성희롱까지 난무했다. 일부 누리꾼은 그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찾아가 ‘저격’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기면 영웅, 지면 전범’


배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단체종목에서 부진한 선수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마녀 사냥’이 이어졌다.

남자 축구대표팀에선 손흥민(토트넘)이 주인공이었다. 손흥민은 온두라스와의 8강전에서 골 찬스를 여러 차례 놓쳤다. 패스 미스가 통한의 결승골로 연결되기도 했다. 손흥민은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자책감에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괴로워했다.

누구보다 아쉬웠을 손흥민에겐 위로가 아닌 비난과 조롱이 이어졌다. 특히 ‘입대를 축하한다’는 반응은 올림픽 출전 목적을 오로지 병역 혜택을 위한 것으로 치부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2015 AFC 아시안컵 영웅은 졸지에 놀림감이 됐다. 대표팀을 지휘했던 신태용 감독이 나서서 “손흥민에 대한 비난을 멈춰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펜싱 남녀 에페 단체전과 탁구 여자 단체전도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8강에서 탈락한 펜싱 남녀 에페에선 가장 많은 실점을 한 박경두(해남군청)와 최인정(계룡시청)이 집중포화를 맞았다. 여자 탁구 역시 가장 부진했던 서효원(렛츠런파크)이 궁지에 몰렸다. 패자의 땀과 눈물엔 靡?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승리의 영광은 함께였지만 패배의 고통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성공의 경험이 부른 착시


여자 배구 간판 김연경은 8강전 직후 “한 경기를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잘하면 ‘갓연경’이란 얘기를 들었다”며 국가대표로 느낀 부담감을 토로했다. 한국 여자 배구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강을 경험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36년 만이었다. 이 뜻밖의 성과가 착시를 불러왔다. 언제든 올림픽 메달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으로 분류된 것이다. 특히 ‘불세출의 에이스’ 김연경이란 존재는 ‘김연경이 있을 때 메달을 따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만들었다.

남자 축구는 4년 전 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찬가지로 이 성공이 독이 됐다. 리우올림픽에서의 8강 탈락이 실망스러운 성적표가 됐다. 런던올림픽 이전까지 최고 성적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의 8강 진출이었다.

펜싱은 런던에서 황금기를 맞았다. 여자 사브르 개인전 김지연의 금메달을 비롯해 무려 6개의 메달을 따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메달을 따낸 지 12년 만이었다. 하지만 선수층이 두터워야 가능한 단체전 메달은 런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박정아에게 쏟아진 비난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4강 이상의 성적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런던에서 직면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로테이션에 구애 받지 않고 득점을 성공시킬 공격수는 여전히 김연경이 유일했다.

이번 대회에서 김연경을 보조한 박정아와 이재영(흥국생명)은 V리그 최고의 레프트다. 특히 이재영은 지난 시즌 국내 선수 중 최다 득점(498점, 전체 7위)을 올렸다. 하지만 올림픽 무대에선 높이에 고전했다. 토종 레프트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득점(358점, 전체 11위)을 올린 박정아가 아니라면 대안이 없었다. 날개 공격수 가운데 가장 많은 블로킹(세트당 0.47개, 전체 10위)을 기록했다는 점도 박정아가 중용된 배경이다(이재영, 세트당 0.27개).

박정아의 부진이 8강 탈락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동시에 최고의 카드였던 것도 사실이다.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할 한국 배구의 현실이다. 선수가 통역까지 맡아야 할 만큼 지원이 미미했다. 8강은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한 성과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국가 대항전 패배가 분한 것은 당연하지만 비난은 마음 속에서 그쳐야 한다.


출전 자체가 논란이 됐던 여자 골프 박인비 선수(KB금융그룹)의 반전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박인비는 LPGA 17승과 ‘커리어 그랜드 슬램(4개 메이저 대회 제패)’에 빛나지만 부상 여파로 최근 부진했다. 후배에게 올림픽 출전권을 양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박인비는 올림픽 출전을 택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의 마지막 탐욕쯤으로 취급 당하면서 평소대로 침착하게 라운드를 돌았다. 그리고 모든 비난을 비웃듯 자신의 화려한 이력에 올림픽 금메달을 추가했다. 박인비가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면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지는 짐작 가求? 끔찍한 상상이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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