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류업체 J사는 지난달 신용장을 개설한 뉴욕의 한국계 은행 지점에 30만달러의 수입대금 지급을 연기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한국에서 수입한 옷이 실린 한진해운 선박이 뉴욕항에 입항하지 못해 물건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자금 수급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 W사와 맺은 계약서상의 납품 기한을 넘기면 클레임이 걸린다. 뒤늦게 물건을 내리더라도 연말 성수기 시즌을 넘기면 모두 이월상품이 돼 반값에 ‘땡처리’해야 한다.
화장품 회사 G사도 최근 한국 거래처에 지난달 수입하기로 한 제품을 비행기로 다시 실어 보내라고 요청했다. J사와 똑같은 이유에서다. 부산항을 떠난 제품은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해상을 떠돌고 있다. 비싼 운임으로 적자를 보게 생겼지만 더 무서운 것은 물건을 받기로 한 미국 백화점의 클레임이다. G사 관계자는 “한진해운에 소송을 내더라도 돈을 돌려받기는 어려울 듯하다”며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달 안으로 한진해운 선박의 하역지체 문제가 90% 해결될 것이라며 사태가 일단락된 것처럼 발표했지만 현지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컨테이너선 한 척에 최소 6000개의 컨테이너가 실려 있다. 모두 한국서 보낸 수출품은 아니지만 적어도 수십 개에 달하는, 한국과 거래하는 기업의 ‘명줄’이 걸려 있다.
한순간에 사업 기반이 흔들리게 된 동포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한국 정부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 이들은 모두 대미(對美) 수출 전선의 가장 앞쪽에 서 있는 기업인들이다.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어 불만이 한국 정부를 향한 압력이 되지 못할 뿐이다. 이들의 입에서는 “한국 정부가 수출 부진 타개책으로 ‘미국의 소비재 시장 공략을 강화하라’고 하더니 우리만 죽게 생겼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달 대미 수출은 6%, 금액으로는 3억3200만달러가 줄었다. 공무원에게는 보고서상 숫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정부가 목표한 빈칸을 채워 넣는 것은 현장의 기업인들이다. “우리가 입은 손해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한진해운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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