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연구소 2.0 시대] 아스펜연구소의 초당적 정책 제언…소리없이 강한 미국 싱크탱크

입력 2016-10-12 16:38  

세미나·리더십 프로그램 등 정책 결정자·기업인들 모여
정치구도·역학관계 벗어나 전 분야 아이디어 모으고 토론

오바마 대통령도 각료 임명 때 청문회 절차 개선 방법 등 자문



[ 이상은 기자 ] 미국 시카고에서 ‘미국컨테이너사’를 운영하던 월터 펩키 회장은 49세가 되던 해 콜로라도의 아스펜이라는 작은 도시를 찾았다. 처음에는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했다. 이내 그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세상의 많은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로이 토론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그는 4년 전에 했던 구상을 떠올렸다. 독일 철학자 괴테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독일의 의사이자 철학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폴란드 출신 미국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 등과 각국 언론인 등 20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2주간 대자연 속에서 수준 높은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토론했다.

그해 펩키 회장은 아스펜연구소를 세웠다. 그는 시카고대의 기금 운용에 참여하는 이사였고, 모티머 애들러가 이끄는 ‘위대한 책’ 세미나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이를 참고해 아스펜연구소의 경영자 세미나를 구상했다. 일상에서 벗어나 세계를 움직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취지였다. 펩키 회장은 “이 모임은 기업의 회계전문가를 더 유능한 회계전문가로 만들려는 게 아니고, 리더가 자기 자신을 좀 더 자각하고, 스스로 교정하며, 충만한 사람이 됨으로써 인간성을 찾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접 발언보다 주관자 역할

아스펜연구소는 미국 워싱턴DC, 메릴랜드주 와이리버, 콜로라도주 아스펜에 각각 근거지를 둔 정책 싱크탱크다. 3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고 워싱턴DC에 상당수가 근무한다. 아스펜에는 리조트를 포함한 컨벤션시설이 마련돼 있으며 와이리버에도 교육시설이 있다.

브루킹스·헤리티지 등에 비해 아스펜연구소는 국내에 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모여 주요 이슈에 관해 균형 잡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아스펜연구소를 꼽는다. 밖에서는 이곳을 싱크탱크로 꼽지만 스스로는 그저 ‘주관자(convener)’인 교육·연구기관이라고만 칭한다. 자기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한다기보다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도록 주선하는 중재자, 주최자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스펜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론 주도층을 타깃으로 설정한다. 정책 포럼을 수없이 열지만 대중에게 공개하거나 보고서를 발간하거나 의회에 제출하지 않는다. 다른 싱크탱크들이 의회 청문회에서 전문가로서 증언하거나 보고서를 의회에 내는 것을 중요한 성과로 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초당적인 정책 제언

아스펜연구소의 프로그램은 크게 네 가지다. 15~20여명의 각 분야 리더를 모아 1주일간 토론하는 ‘세미나’, 지역·분야별 리더의 네트워킹을 지원하는 ‘리더십 프로그램’, 정책 결정자들을 불러 초당파적 토론을 하는 ‘정책 프로그램’, 아스펜 아이디어스 페스티벌 등 대중 상대 행사다. 특히 정책 프로그램에서 아스펜연구소의 ‘초당파적’인 성향은 강점으로 작용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각료를 임명할 때 거치는 청문회 절차 개선 방법에 관해 브루킹스도, 미국진보센터도 아니라 아스펜연구소에 자문했다. 공화당의 지지도 함께 받아야 했던 그가 한쪽에 쏠리지 않았다는 평판을 얻은 곳을 찾은 결과다.

정책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37가지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으며 각 프로그램이 하나의 연구소처럼 개별적으로 기획하고, 모금받고, 독립적으로 의사결정하는 구조다.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언론에 나가지 않는 ‘오프 더 레코드’ 기반으로 운영해 자유로운 아이디어 교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미국·옛 소련 핵확산방지 프로그램 아이디어 중 상당수가 이 연구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할 때 온실 등 남겨진 자산을 구입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식물을 키울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도 여기서 나왔다.

참여세대·계층·분야 광범위

2005년 시작해 매해 여름 1주일간 열리는 아스펜 아이디어스 페스티벌은 이 연구소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큰 행사다. 1주일간 연사만 350명, 유료 등록 청중이 1500명, 베조스재단이 지원하는 장학생이 150명 정도 참석한다. 개별 강연에 신청해 따로 듣는 추가 참가자까지 합하면 약 4000명에 이른다.

연사에겐 항공료와 숙박만 제공하고 따로 강연비는 주지 않는데도 오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13년 여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 때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과 조지 부시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폴슨, 오바마 정부 때 재무장관인 제이컵 루가 모두 연사로 등장했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인 페리 첸 킥스타터 창업자, 데이비드 루빈스타인 칼라일그룹 공동창업자,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기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 등이 한자리에 서기도 했다.

이들은 시민운동의 미래, 사회적 기업가 정신, 항공산업의 미래, 우주여행 가능성, 미국 헌법정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이야기를 나눈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TED 등과 경쟁하는 포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연구소는 브루킹스·헤리티지재단이나 미국진보센터처럼 초기에 대규모 기금을 조성해 시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교적 튼튼한 재무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수입은 지난해 1억4600만달러 정도였다. 2000년 수입이 2000만달러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 7배로 늘어났다.

연구소는 록펠러, 카네기, 맥아더, 포드 등 재단법인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원금을 받는다. 또 아이디어스 페스티벌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다. 정부 지원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재단법인 지원금이 60%, 기업 기부가 5%, 기금운용 수익과 대중 행사 수익이 20% 정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성공 요인으로는 ‘초당적’이라는 점 첫손가락에 꼽힌다. 정치 구도나 역학관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아이디어를 모으고 토론하려는 수요가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업인들이 처음에 많이 참여했고, 철학이나 과학기술 등 인류의 보편적 문제도 함께 다룸으로써 이런 성향이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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