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울컥과 버럭

입력 2016-11-27 18:33   수정 2016-11-28 05:21

신달자 < 시인 >


동네에 사는 혁이 엄마가 김장 한 포기를 가져왔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재수시키느라 지난 2년을 바쁘게 살았다. 힘든데 왜 김장은 했어요? 적당히 사 먹지 이번엔… 하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말했다. “그래도 할 건 하고 살아야 하니까요.”

시험이 어려웠다고 혁이 엄마 얼굴빛이 며칠 사이 더 확 내려앉은 기분이었는데 김장까지 가지고 왔다. 그렇다. 먹고 살긴 해야 하고 어떤 화급한 일이 있더라도 할 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코가 시큰거리며 울컥하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지난 2년을 잘 안다. 새벽 6시면 영락없이 성당에 있고 그녀의 합친 두 손은 언제나 떨리고 있었으며 집안에서도 그 아이가 먹을 음식을 챙기느라 가만 앉는 시간이 드물었다. 그녀가 앉으면 옆에 책이 있었다. 책의 이름은 늘 아들의 심리를 챙기는 심리학에 관한 것이었고 인간의 의지와 인내를 설명하는 페이지는 열 개도 넘게 접혀 있었다. 잠은 늘 2시가 가까워서였다. 아들이 들어오는 시간은 언제나 1시가 넘었고 그때도 먹을 것을 챙기고 이야기도 하고 그녀는 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널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이 말과 함께 말이다.

혁이 엄마뿐이겠는가. 모든 재수생과 고3 엄마는 모두 그렇게 견뎌야 했다. 도무지 교육이 뭔데? 하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땅의 엄마들은 그 지루한 고통을 큰 저항 없이 고스란히 감당해낸다. 우리들의 할머니 그 할머니들도 다 그랬다. 하루종일 허리 펼 시간이 없고 과다한 노동으로 몸이 망가져도 그들은 단 한마디 “내가 왜 이 집에서 일만 하지?” 하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집안일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의 품성이었던 것이다. 여자의 치마폭이 넓은 것이 그 품성 넓은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세상이 굴러가고 곤두박질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엄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옆집 스테이크집 남자가 손님이 없는 시간인지 집 앞 길 위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가끔 본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담배를 끄고 인사를 한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집주인이 다시 월세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할 땐 먼 하늘을 바라본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하는 그 고기장사는 요즘 따라 손님이 줄었다. 이 남자는 “손님이 없어 어떻게 해요”라고 하면 손님 한 명이 링거 한 병 맞는 거와 같다고 하며 웃는다.

월세는 오르고 손님은 줄고 아내는 말이 없어지고 아들은 미소를 잃었다. 그 모두 상실의 무게가 이 남자의 어깨 위로 오른다. 몸이 무겁지만 또 하루를 움직인다. 나는 멀리서 담배를 피우며 먼 하늘을 보는 남자를 보며 울컥한다.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자 나는 혼자 말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넘어가는 것’이다. 지금 세찬 파도가 넘실거리는 계단을 기어이 오르고 말 것이다. 저기 우리가 소망하는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오늘, 바로, 이 시간을 이 악물고 건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밟았던 낙엽은 쓸모없는 게 아니다. 자신의 기운을 전부 나무에게 주고 더는 줄 것이 없다고 떨어진 잎은 겨울 나무뿌리를 덮고 드디어 뿌리에게 영양으로 스며든다. 성직자 같지 않은가. 이거 또한 울컥 가슴을 적신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버럭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른다.

신달자 <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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