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아이젠그린 지음 / 박복영 옮김 / 803쪽 / 3만8000원
세계경제 안정 이끈 금본위제, 1차 세계대전 후 신뢰 무너져
부양정책 막아 대공황 촉발
고정환율 일찍 포기한 영국·스웨덴, 경기확장 정책으로 위기 넘겨
세계사적 관점서 대공황 조명
[ 송태형 기자 ] 2008년 시작된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자본주의와 금융구조, 국제통화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일부 전문가는 금융 위기의 원인이자 증폭 요인인 투기적 금융시장과 불안정한 국제통화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없이 막대한 돈을 풀어 경기 부양에 나서는 처방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금융 개혁을 방치할 경우 더 큰 위기를 불러와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국제통화시스템의 대안으로 통화 가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금본위제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이전 금융위기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역사적으로 금융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법을 찾기 위한 시도다. 이 가운데 ‘근대의 대형 경제파국’인 1930년대 대공황이 새삼 주목받았다.
최근 국내 번역·출간된 《황금 족쇄》는 이런 맥락에서 국제통화시스템과 금본위제의 역사에 대한 경제사적 통찰을 제공할 만한 책이다. 국제 금융·통화 시스템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경제학과 교수가 1991년 집필했다.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시각에서 대공황을 해석한 초기 저작 중 하나로 이후 금본위제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저작으로 꼽힌다.
저자는 미국의 산업생산 감소와 주식시장 폭락으로 인한 거대 경제 불황으로 바라보는 이전 대공황론을 뒤집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대공황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1차 대전 이전 세계 경제와 무역을 뒷받침한 통화체제였던 금본위제가 전후 대공황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었음을 밝히고, 금본위제와 다른 요인들이 세계 대공황을 발생시키고 증폭시킨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다.
이전까지 금본위제와 대공황의 관계에 대해 금본위제가 붕괴하면서 금융 안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자본 도피가 일어나는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번졌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여기에는 금본위제를 금융 안정과 동의어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저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1920년대 금본위제는 안정의 동의어이기는커녕 전간기(1·2차 대전 사이) 금융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위협하는 일차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라는 세계적 범위의 고정환율제가 정책 당국의 손발을 묶는 족쇄로 작용해 팽창적 경제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1차 대전 이전 금본위제가 세계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끈 요인은 대중의 신뢰와 국제 협력이었다. 사람들은 정부가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적 목표로 삼아 중앙은행의 금 준비금을 방어하고 통화의 금태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1890년과 1907년 세계 신용 상황이 심하게 위축됐을 때 어음을 할인하거나 금을 빌려주는 식으로 명시적이고 의식적으로 협력해 위기를 막았다.
1차 대전 이후 일어난 정치적·경제적 변화는 신뢰와 협력을 무너뜨리거나 약화시켰다. 전시 정부의 조합주의 전략, 선거권 확대와 노동자 정당의 성장 등으로 국제수지·재정 균형보다는 고용 안정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채택하라는 압박이 강해졌다. 금본위제 방어를 위해 세금 인상이나 정부 지출 삭감을 한다는 보증이 없어져 신뢰성이 약해졌다.
금본위제의 구조에서도 국제적 정책 공조가 이뤄져 각국이 동시에 경기팽창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국가 간 반목과 갈등, 세계 경제에서 자국의 지위와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미국의 협소한 시각 등이 국제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표적 흑자국인 미국은 1928년 증시 과열 등을 우려해 긴축 정책을 폄으로써 금본위제에 얽매인 적자국들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금본위제를 유지하려면 적자국에서 경기부양이 필요할 때 팽창 정책을 쓰지 못하고 긴축기조를 지켜야 한다. 국내에서 경제정책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선 고정환율제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했다. 저자에 따르면 금본위제를 포기한 국가들의 회복 속도가 빨랐다. 1931년 평가절하를 단행한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영국 호주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1936년까지 금본위제를 고집한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등의 회복 속도는 매우 늦었다. 미국도 1933년 루스벨트가 집권해 금태환 정지와 평가절하가 이뤄진 후 회복이 시작됐다.
저자는 통화 공급과 가치 조절로 경제를 조정할 수 있다는 통화주의자의 시각을 견지한다. 고정환율제를 지지하는 금본위제 지지자들과는 인식의 간극이 크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주요국 정책 결정자들이 모여 ‘수조 달러의 경기 부양 계획’에 합의한 조치를 “바람직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금본위제의 역사는 확장적 경제 정책과 국제적 협력 및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역사의 전범(典範)으로서 중대한 경제사적 통찰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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