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터, 조선 초 경복궁 후원…일제, 용맥 자르려 총독관저 세워
"터 넓고 북악산 형세 보면 명당"…"신의 강림지로 죽음의 공간"
[ 홍영식 기자 ] 청와대 터는 1426년 경복궁 후원(後園·집 뒤의 정원)으로, 1868년 경복궁 복원 뒤엔 북원으로 불렸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기를 누르고 ‘용맥(龍脈·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을 자르기 위해 1939년 이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총독관저로 이사하면서 경무대라고 이름 지었다.
4·19혁명 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라는 이름이 국민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준다며 청와대로 바꿨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9년 청와대를 신축(준공 1991년)하면서 본관과 관저를 분리하고, 춘추관도 새로 지었다.
경복궁과 청와대, 경복궁 터를 두고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吉地)-흉지(凶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풍수지리학자 지종학 씨가 쓴 《청와대 입지의 재조명》에 따르면 청와대와 경복궁은 뒷산인 북악에서 좌우로 뻗어 낙산을 청룡으로 하고, 인왕산에서 사직단에 이르는 산줄기를 내백호로 삼고 있다. 지씨는 이 책에서 앞에 남산이 있고, 복판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바람을 가두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곳)’를 이루고 있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고 소개했다.
청와대 주인(대통령)들의 운명은 개인의 문제일 뿐 터가 명당임에는 틀림없다는 주장도 있다. 터가 넓고 반듯하며 뒷산(북악산)이 꽃봉오리와 같은 형세도 명당의 증거로 제시된다.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등은 청와대 터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최 전 교수는 《땅의 눈물 땅의 희망》이란 책에서 청와대 앞길을 경계로 사람의 공간과 신의 강림지로 나뉜다고 했다. 청와대 터는 신의 강림지로 죽음의 공간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최 전 교수는 대통령 관저를 경기 성남시 세종연구소 터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우리땅 우리풍수》에서 “북악산은 저 혼자 우뚝 서 있는 형상이어서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저 혼자 오만불손하게 서 있으며, 남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모습”이라며 청와대는 살 터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경복궁과 청와대 터가 흉지라는 증거로 여러 가지 사례가 제시된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천도한 직후 왕자의 난이라는 형제간의 골육상잔이 일어났고, 임진왜란 때 화재로 폐허가 된 뒤 270년 동안 방치됐으며, 고종 때 중건된 이후 조선이 쇠국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 꼽힌다. 또 경무대-청와대에 들어왔던 대통령이 하야·시해·감옥행·탄핵 등 시련을 겪은 것도 흉지 사례로 거론된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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