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고용 확대는커녕…"
"경영환경 더 나빠질 것" 80%…내년 실적 목표치 낮춘 곳도
"탄핵정국 끝나면 대선…"
특검·헌재 총수 줄소환 우려…경제민주화 법안까지 '봇물'
[ 장창민 기자 ] 국내 간판 기업들이 주저앉아 있다. 새해 사업 구상을 할 겨를도 없다. 기업들은 올 연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검찰 수사→국회 국정조사 청문회→특별검사 조사→탄핵 정국→대선 정국’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덫에 걸려 있다. 국회와 특별검사, 헌법재판소 등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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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금리 인상과 보호무역주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중국의 한국 기업 보복 등 대내외 변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투자계획 및 글로벌 전략 수립 등 본업(本業)은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미래가 불안한데 마음 놓고 투자나 채용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겠느냐”는 하소연이 나온다.
◆내년 공격 투자·채용 포기
한국경제신문이 18일 10대 그룹(자산 기준, 공기업과 금융회사 제외)을 대상으로 ‘내년 경기전망 및 사업계획’을 긴급 설문조사한 결과는 예상보다 암울했다. 복잡다단한 대내외 변수로 10대 그룹의 절반 이상인 여섯 곳이 내년 사업계획을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여섯 곳은 특검과 탄핵 등 정국 혼란과 미국·중국 리스크 등 대외변수를 주된 이유로 꼽았다. 기업들이 통상 10월 말 또는 11월 초에 내년 사업계획 초안을 짜고, 늦어도 12월 중순에는 확정하던 것에 비하면 속도가 한참 늦다는 지적이다.
10대 그룹 중 여덟 곳은 복잡한 대내외 변수로 내년 경영 환경이 올해보다 더 나빠질 것으로 내다봤다. 다섯 곳은 ‘올해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세 곳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어려운 해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올해와 비슷할 것’으로 본 그룹은 두 곳에 불과했다.
내년 경영 환경을 좌우할 주요 변수로 △미국 금리 인상과 환율 움직임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따른 수출 부진 △내수 침체 등 경기 부진 △최순실 사태에 따른 특검·탄핵정국 △대선과 맞물린 야권의 경제민주화 추진 등을 꼽았다.
내년 성장마저 포기한 곳도 많았다. 10대 그룹 중 다섯 곳이 내년 이익 목표에 대해 ‘올해와 비슷하다’고 답했다. ‘높인다’고 한 그룹은 세 곳, ‘낮춘다’고 한 그룹은 한 곳이었다. 매출 목표는 ‘높인다’는 그룹이 다섯 곳이었으며 ‘올해와 비슷하다’가 세 곳, ‘낮춘다’가 한 곳이었다.
어려운 경영 환경을 반영하듯 상당수 그룹은 내년 경영 키워드를 ‘변화’로 꼽았다. 두 곳이 ‘변화와 혁신’을 경영 키워드로 제시했으며 나머지는 ‘변화’(한 곳), ‘경쟁력 강화’(한 곳), ‘경영 변화 예측과 선제적 대응’(한 곳) 등을 꼽았다. 그룹 다섯 곳은 경영 키워드를 선정하지 못했다.
◆불안감 커지는 기업들
주요 그룹이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하고 우와좌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어서다. 복잡한 국내 정국 탓이 크다. 이미 주요 그룹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과 관련해 압수수색 등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받았다. 지난 6일에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기업 총수 아홉 명이 불려나가 보여주기식 ‘정치 쇼’에 들러리까지 섰다. 이번주부터는 특검 조사도 본격화한다. 기업인들이 헌법재판소까지 불려나갈 가능성도 있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기업 총수들이 마음놓고 해외 출장이라도 갈 수 있겠느냐”며 “특검과 탄핵 정국이 끝날 때까지 납작 엎드려 있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고민은 탄핵 정국 이후 대선 정국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야권 후보들이 상법 개정안을 비롯한 경제민주화 법안을 줄줄이 대선 공약으로 띄울 공산이 커서다.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정치 문제에 엮이면서 투자나 고용 문제를 생각할 여력조차 없어지고 있다”며 “기업할 맛이 안 난다”는 장탄식이 나오고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와 중국의 반한(反韓) 정책이 노골화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정부 대응책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글로벌 기업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 한국 기업들이 정치권만 바라보며 손만 빨고 있게 생겼다”며 “내년 경제에 예상치 못한 후폭풍이 불어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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