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동욱/유창재 기자 ]
■ 2015년 7월 삼성물산 합병 결정 때 무슨 일이…
2015년 7월10일 오후 6시 서울 강남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사옥. “기명 표결 결과는 찬성 8표, 표결기권 3표, 중립(섀도 보팅) 1표 등으로 합병안이 가결 요건(과반수 7표)을 충족했습니다.”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발언을 끝으로 3시간 넘게 진행된 이날 투자위원회가 마무리됐다. 안건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안에 대한 국민연금 보유 주식의 의결권 찬반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투자위원 A씨는 “내규에 따라 합리적인 토론이 이뤄졌으며 반대표도 적절히 나와 회의가 끝날 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며 “그럼에도 배임과 외압 논란이 확산되는 것이 너무 황당하다”고 말했다.
■ 왜 내부 투자委서 결정했나 10년간 외부 전문委 상정은 단 1건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28일 긴급 체포한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민간 자문위원회인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이하 전문위)가 아니라 기금운용본부 내부 투자위원회가 합병안을 처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투자위원회에 참여한 국민연금 실무자들이 전하는 상황은 특검팀의 인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기금운용본부 내규상 기업분할과 합병 등의 안건은 투자위원회가 처리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투자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한 전문가 집단이 판단하는 게 온당하다는 것으로 세계 모든 연기금도 이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투자위원회는 본부장을 포함해 8명의 기금운용본부 실장과 본부장이 지명하는 3명의 기금운용본부 팀장으로 구성하는 의사결정기구다. 투자위원회가 판단하기 곤란한 안건만 전문위가 처리하도록 규정돼 있다. 2006년 전문위 설립이후 그해 5월까지 기금운용본부가 처리한 60개의 개별 기업 합병안에 대한 찬반 결정은 모두 투자위원회에서 확정됐다.
기금운용본부의 스텝이 꼬인 것은 삼성물산 합병 전인 6월에 SK(주)와 SK C&C 합병안을 전문위에 넘긴 뒤부터였다. 당초 예상과 다르게 전문위가 반대 의견을 내놓자 기금운용본부 측은 크게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민간 자문위원들이 합병 같은 주요 경영사안을 판단하는 게 맞지 않는다”는 비판적 여론도 불거졌다.
■ 결정방식 왜 바꿨나 실무진 차원의 결정에 큰 부담 느껴
이에 따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안 처리 방식을 놓고 기금운용본부 실무자들의 ‘장고’가 시작됐다. 기금운용본부는 이즈음에 보건복지부 측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 전문위에 상정할 가능성이 있는 안건은 복지부와 사전 조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특검팀은 복지부 공무원들이 이런 상황을 당시 장관인 문 이사장에게 보고한 한 장짜리 문건을 직권남용 등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문 이사장은 “당시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삼성 합병안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며 “특히 투자위원회의 개별 사안에 대해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며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 실무진은 기존의 주식 의결권 행사 방식과 절차의 타당성 여부를 면밀히 따져본 뒤 새로운 기준과 절차를 마련했다. 종전에는 주식 의결권 행사 소관 부서인 책임투자팀이 △찬성 △반대 △전문위 부의라는 1차 의견을 투자위원회에 제시하고 투자위는 그 의견을 대체로 수용했다. 하지만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안을 동일하게 처리하면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된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연금의 일개 팀장이 사실상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실무진은 책임투자팀이 1차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투자위원들이 △찬성 △반대 △중립(섀도 보팅) △주총 불참 △표결 기권 등 5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여기서 ‘표결 기권’은 전문위 안건 상정을 의미한다.
기금운용본부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기준은 찬반 결정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 실무자들의 부담을 낮춰주기 위한 성격도 강했다”고 말했다. 당시 합병안을 전문위가 처리하면 반대 의견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 경우 실무진은 “국민연금이 국내 간판 기업(삼성)을 공격하는 해외 헤지펀드와 손잡고 합병안을 무산시켰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했다는 후문이다.
■ 홍완선 '인사 농단' 있었나 예정된 정기인사…2명은 보직 맞교환
특검팀은 투자위원회가 개최되기 열흘 전 기금운용본부의 내부 인사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고 있다. 당시 인사에서 바뀐 3명의 실·팀장이 모두 투자위에 참석해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홍 본부장이 반대표를 던질 만한 사람들을 미리 솎아냈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아는 내부자들은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적법하고 정당한 인사였다”고 설명했다. 우선 당시 인사는 국민연금의 정기 인사였다. 더욱이 3명 가운데 교체된 2명의 팀장은 보직을 서로 맞바꾼 것이었다. 인사가 없었더라도 투자위원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맡은 직책도 증권리스크관리팀장, 패시브팀장 등으로 국내 주식 운용과 연관된 부서다. 나머지 한 명은 홍 본부장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실장이었다.
기금운용본부 내부에서는 합병안 처리 당시 핵심 실무자였던 실·팀장 4명의 증언이 특검팀 수사 결과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모 당시 운용전략실장, 한모 주식운용실장, 채모 리서치팀장, 정모 책임투자팀장 등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 본부장의 만남에도 배석했다. 이 실장과 한 실장은 지난 6월 국민연금공단에 사직서를 낸 뒤 민간 기업으로 옮긴 상태다.
특히 이 실장은 주식의결권 행사 주무부서 실장이었던 데다 투자위원회에서도 ‘표결기권’을 선택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그동안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청와대나 복지부의 부당한 압력은 없었으며 투자위원회의 찬성 결정은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좌동욱/유창재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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