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부 김용준 기자) 바둑기사 이창호, 작곡가 주영훈, SBS 아나운서 윤현진.
전혀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남양유업이 주관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창호는 1977년 참가했습니다. 19개월된 이창호의 몸무게는 4.8kg이었습니다. 전국 2위를 차지했다는 기록이 남양유업에 남아있습니다. 주영훈은 그보다 4년전인 1973년 12개월때 참가했는데 몸무게 4.8kg이나 나갔다고 하네요. 그는 이후 남양 분유 잡지광고 모델로, 방송에도 나갔다고 합니다. 윤현진 아나운서는 1979년 참가했습니다.
◆첫 대회 우승한 우량아의 몸무게는?
남양유업은 50년 전인 1967년 1월10일 국내에서 처음 분유를 제조해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는 마케팅에 차원에서 1971년부터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를 주관했습니다. 첫 대회 참가 신청자만 183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첫대회 우량아는 강원도 춘천에 사는 한00 아기였다고 합니다. 1969년 11월 생으로 당시 16개월이었는데 몸무게가 무려 13㎏이나 했다고 합니다. 키는 85㎝ 였구요. 지금 엄마들은 이 정도면 아이의 건강을 걱정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도 어렴풋한 기억이 있습니다. 40대 이상은 기억할 겁니다. TV로 중계가 될 정도로 유명한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건강해 보이는 아기들이 홀딱 벗은 채로 TV에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손에 의지해 카메라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대회 취지에 대해 남양유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2세만큼은 건강하게 잘 키우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우량아로 선발되면 선물도 받고,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량아 선발대회 논란
당시 우량아 선발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20개월 미만, 가족(부모)이 건강해야 한다, 질병이 없어야 한다, 영양상태가 좋아야 한다’ 등이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몸무게와 머리둘레가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들 머리둘레를 재던 것을 기억하는 40대 후반의 아줌마들도 있습니다. 왜 머리둘레가 중요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대회를 둘러싸고 몇가지 논란도 있었습니다. 우선 시초 논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남양유업이 대회를 주관하기 전에는 1957년께부터 비락이라는 회사가 우량아 대회를 개최했다는 신문광고도 남아있습니다. 어찌됐건 우량아 대회를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남양유업부터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두번째 논란은 우량아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아기=우량아’가 아니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아기=우량아’라는 공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막을 내리다
우량아 뽑기 대회가 사라진 것은 또다른 스토리입니다. 1983년 13회 대회를 끝으로 우량아 선발대회는 막을 내렸습니다.
몸무게와 머리둘레를 기준으로 뽑는 게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확산된데 따른 것이란 얘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남양유업의 설명은 다릅니다. 전두환 정권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군부독재정권은 사람들이 모이면 데모를 할 것이라는 강박에 시달렸겠지요. 우량아 선발대회는 엄마 아빠와 아기들이 단체로 모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조차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남양유업에 근무하며 이 대회에 관여했던 한 원로는 “정부가 사람들 모이는 행사는 하지 말라고 해 대회를 중단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40대 이상 세대에게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우량아선발대회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끝)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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