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딸을 시집 보냈다. 1950년대 태어난 우리 세대는 남자는 군대 갔다 와서 직장 잡으면 장가 들 생각하고, 여자는 학교 마치고 나이 차면 결혼하는 게 대세였다. 필자도 스물여덟 나던 해에 다섯 살 아래 아내와 결혼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일이 우선이고, 자립이 먼저가 됐다. 굳이 결혼할 필요도 없단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고, 혼자 노는 데 익숙해져 간다. 먹고살 수만 있다면 뭐라도 저질러 보던 예전보다 분명 많이 가졌지만 살아가기엔 더 퍽퍽해진 면이 있다.
딸아이도 일 하느라 그랬는지 졸업한 지 해가 몇 번 바뀌어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어련히 가겠지” 하면서도 조바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배필을 만나고 나니 결혼까지 일사천리였다. 예식장은 37년 전 아내와 결혼한 곳이다.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순간은 모든 아버지가 고대하는 장면일 것이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집에서 몇 번 발을 맞춰 보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의 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마치 아이가 첫걸음 뗄 때 잡아주던 것처럼 보조를 맞추며 걸어야지’ 다짐을 했다. 그래도 어제는 무척 떨렸다. “신부 입장~” 하는데, 아내와 다시 그 자리에 선 것처럼 입술이 말라 왔다. 솔직히 무슨 정신으로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가와 인사하는 신랑에게 손을 건네 줄 때 시큰한 게 지나갔다.
상견례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딸아이가 늦는 날이면 왠지 더 기다려지고, 아이 책상을 쓸어보곤 했다. 문 열어 보고 불을 켜 보고 하는 일이 앞으로도 있을 테지. “저녁 드세요” 하던 음성이 그리워질 테지. “고맙다. 잘 자라줘서 고맙고, 가정을 꾸리기 힘든 시대에 결혼해 줘서 고맙다. 크면서 너는 이미 효도를 다 했단다. 옹알이할 때부터 집에 돌아오면 ‘아빠’ 하고 안겨오던 모습, 네 투정, 예쁜 짓, 웃음, 이런 것들로 이미 충분히 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뭘 더 해줘야겠느냐. 지금부터 네가 보여주는 모습은 죄다 보너스로 여길 테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평소 아줌마로 부르는 아내에게도 전하고 싶다. “여보, 미화 씨. 정말로 감사한 사람은 당신이오. 당신이 집안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 주었기에 나도 승부에 매진할 수 있었소. 어른을 모시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때에 맞춰 대소사 챙기고, 이런 일들을 어떻게 나 같은 남자가 감당하겠소? 내 곁에 둥지를 튼 꿈 같은 세월이라고 비익조(比翼鳥)를 노래하는 당신. 아니오, 나야말로 당신 덕에 두 날개로 날 수 있게 되었소.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소.”
조훈현 < 새누리당 국회의원 chohoonhyu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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