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잠룡으로 꼽혀온 현직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잇달아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전격 불출마 선언을 하기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예비후보 접수 첫날인 지난달 26일, 중앙 정치무대에서 고향 제주도로 옮겼던 원희룡 지사는 지난달 31일 대권의 꿈을 접었다. 서울시장은 인구 1000만명에 육박하는 매머드 수도를 관장하는 까닭에, 제주지사는 도백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대한민국 유일의 자치도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 자리다.
불출마에 엇갈리는 시각
박 시장과 원 지사가 게임 본격화 이전에 출마를 포기하자 ‘결단’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떠밀려 내린 결정’이라는 의구심이 겹치는 양상이다. 의구심은 불출마가 이번 대선만인지, 아니면 계속성을 갖는지로 모아진다.
‘정치는 생물이자 공학’이라는 셈법으로 따져 보면 현직들의 불출마 선언이 밑질 것 없어 보이는 몇 가지가 드러난다. 개헌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와 대통령 5년, 지자체장 4년인 임기를 감안하면 다음 대선인 2022년은 지방선거가 겹친다. 현직 잠룡 지자체장에게 임기를 마치거나 임기 직전 대권 레이스에 뛰어들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타이밍이 주어지는 셈이다.
정치권이 현재 ‘2여 2야’ 구도를 유지할 경우, 내년 지방선거 후보는 4명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고 현직이 갖는 프리미엄도 커진다. 지금 요지부동인 지지율로 고민하느니 눈 질끈 감고 지자체장 한 번 더하면 그만이다. 대선 후보를 고집하면 기초 지자체장보다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해 지방선거 기반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다.
현직 가운데 상당수는 자의든 타의든 잠룡으로 인식돼 온 것이 사실이다. 지자체 주민들로서는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지자체장 자리를 이용한다거나, 잠룡으로서 확장성을 키우려고 오지랖 넓게 활동했다고 의심하기 좋은 대목이다. 가장의 오지랖이 넓어 살림살이가 팍팍한 집들을 주변에서 충분히 봐온 터다.
남은 임기, 구체적인 설명부터
자치단체장이 지자체 살림을 잘 꾸려서 국가 경영에 나선 사례는 다른 나라는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런 만큼 잠룡들의 대선 불출마 선언은 ‘고민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문제는 불출마 선언 이후다. 대권의 꿈을 포기했다면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시정(市政)과 도정(道政)을 어떻게 이끌지 시민과 도민에게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도리다. ‘악마가 숨어 있는 디테일’을 찾아 개선책을 내놓지 못하는 현직이라면 그동안 행적이 적절치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지해준 시민과 도민들에게 절차적 정당성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불출마 선언만 던져 놓으면 의구심과 억측은 증폭되게 마련이다.
불출마 선언이라는 용기를 냈으니 내년 지방선거 출마 때도 두 번째 용기를 보여주면 어떨까. 지자체 살림을 잘 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공약 말이다. 지자체장은 대권을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대권으로 이어지는 다리임을 스스로 입증하자는 거다. 현직 잠룡들의 불출마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은 임기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자세다. ‘대선 불출마 선언, 도대체 뭣이 중헌디.
박기호 선임기자 겸 좋은일터연구소장 khpar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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