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출발부터 꼬인 초대형IB 육성

입력 2017-02-01 18:18   수정 2017-02-02 05:45

기업 투자 늘리면 장외파생 거래 못해
"모순된 규제…차라리 안 하고 말지"

오상헌 증권부 차장 ohyeah@hankyung.com



외환위기가 터진 1990년대 말 대한민국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엔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 돈 될 만한 ‘일감’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풍부한 자금과 글로벌 네트워크로 무장한 이들은 돈줄이 막힌 국내 기업들을 찾아가 계열사 매각, 회사채 발행 등을 도와주는 대가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진로 부실채권(NPL) 투자로 1조원 가까운 수익을 거둔 골드만삭스처럼 직접 투자로 목돈을 거머쥐기도 했다.

덩치도 작고 노하우도 없는 국내 증권사들은 해외 IB들이 자신의 ‘텃밭’에서 한몫 단단하게 챙겨가는 걸 부러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한 ‘한국형 IB 육성론’은 10년 논의를 거쳐 작년 8월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초대형 IB 육성방안’으로 완성됐다. 올 하반기 시행되는 새 정책의 핵심은 ‘자금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덩치를 키워 기업금융에 뛰어들라’는 것이다. 금융위는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증권사에는 만기 1년 이내 어음발행을, 8조원 이상 증권사에는 은행 예금통장과 비슷한 종합투자계좌(IMA) 업무를 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획기적인 인센티브”라는 금융위의 설명과 달리 ‘수혜 당사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기업금융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에서다. 혼란은 증권사의 건전성 지표인 순자본비율(NCR) 규제에서 비롯됐다. 금융위는 영업용순자본을 총위험액으로 나누는 NCR 산출 방식이 대형 증권사의 적극적인 투자를 가로막는다며 2015년 신(新)NCR 제도(영업용순자본-총위험액/업무 단위별 필요유지 자기자본)로 대체했다. 옛 NCR 시절 150%였던 ‘적기시정조치’ 기준도 100%로 낮췄다. 이 덕분에 미래에셋대우 등 대형 증권사들의 NCR 지표는 1000% 이상으로 상향 조정돼 넉넉한 투자실탄을 갖게 됐다.

문제는 ‘폐기처분’된 옛 NCR 기준이 장외파생상품거래에선 여전히 유효한 기준으로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것도 신규 장외파생상품거래를 하려면 적기시정조치 기준보다 2배 높은 200%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 조건으로. 대형 증권사들의 옛 NCR은 200~300%로, 이 기준을 겨우 맞추는 수준이다. 금융위 요구대로 기업 투자를 늘리면 옛 NCR이 떨어지기 때문에 신규 장외파생거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작년 11월 장외파생상품 규제도 신NCR로 바꾸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파행 등으로 통과를 장담하기는 힘든 상태다. 더구나 찬성의견을 낸 금융위와 달리 금융감독원은 “장외파생은 위험이 크기 때문에 별도 규제가 필요하다”며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쪽은 기업투자를 늘리라며 ‘선물’을 주고, 다른 한쪽에선 기업투자를 늘릴수록 ‘벌칙’을 내리는 모순적 상황이다. 업계에선 “기업투자를 줄일지언정 장외파생을 안 할 수는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앞뒤가 안 맞는 규제 탓에 10년 논의 끝에 나온 초대형 IB 육성방안은 이렇게 삐걱거리고 있다.

오상헌 증권부 차장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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