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병훈 기자 ] “오직 너만은 굽실굽실 비굴의 자세를 지니지 않기를 / 무엇보다도 별을 바라보면서 / 비굴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기를 /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 / 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굴비에게’ 부분)
“시각장애인들이 야구를 하는 까닭은 / 희망이라는 안타를 치기 위해서다 / 단 한 번이라도 9회 말 투 아웃에서 / 희망의 홈런을 치고 / 절망의 1루로 달리기 위해서다 / (중략) / 희망을 막는 수비는 없다”(‘시각장애인 야구’ 부분)
정호승 시인(67·사진)의 시에서는 이처럼 삶을 향한 힘찬 맥박이 느껴진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외쳐야만 할 것 같다. 정 시인이 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를 냈다. 2013년 이후 4년 만의 새 시집이자 그의 열두 번째 시집이다. 수록작 152편 가운데 3분의 2는 미발표작이다. 희망을 거절한다는 우울한 얘기를 시집 제목으로 단 것은 무슨 까닭일까. 표제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 당신을 사랑한다”(‘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부분). 아득한 절망에서조차 희망을 길어올리는 정신력, 낙천성, 열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시인이 말하는 희망은 뭐를 위한 것일까. 그는 “강물도 강을 다 채우지 않고 바다로 간다”(‘결핍에 대하여’ 부분)며 비어 있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 / 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결핍에 대하여’ 부분)는 구절에선 비움으로써 채워진다는 불교적 세계관이 연상된다.
정 시인은 “인간은 결국 희망과 생명의 존재다.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희망과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번 시집을 통해 희망이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은 무엇을 통해 이뤄지는가, 무엇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가 하는 고통의 질문을 끊임없이 했다”고 설명했다. 김용택 시인은 “정 시인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현존의 모든 고통을 감싸안고 넘어서려는 것 같다”며 “어쩌면 그것은 용기라는 말보다 인내라는 말로 표현되기에 적합한, 부단한 수행의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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