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서 육개장 나르고 VIP 초대권 구하기 '사활'
새벽 귀국하는 회장님 모시러 직원 30여명 출국장서 대기도
[ 윤희은 기자 ]
한 번 잘 ‘모신’ 의전이 열 번 잘한 업무보다 낫다. 김과장 이대리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푸념이다. 상하관계와 접대 문화를 중요시하는 한국 직장사회에서 의전은 매우 민감한 업무 중 하나로 꼽힌다. 얼마나 잘했는지에 따라 기회가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한다. 의전하는 상사의 직급이 높을수록 ‘양날의 칼’은 더욱 예리해진다. 회장·사장급 상사의 의전을 앞둔 직원들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의전 최고봉은 공항 의전
공항 의전은 ‘의전 중 의전’으로 꼽힌다. 한 은행 홍콩법인장이던 김모씨는 몇 년 전 신임 행장 박모씨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사의 비서실과 인사팀을 탐문해 어느 정도 의전을 해야 할지를 살폈다. 예전 행장만큼은 의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고, 그는 조용히 입국심사대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제는 박 행장이 비행기 일등석에서 다른 한국 대기업의 정모 사장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두 사람은 목적지인 홍콩에 다다른 뒤 함께 비행기에서 나왔지만, 입국심사대에서부터는 길이 갈렸다. 정 사장은 입국장 안까지 들어온 자사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심사 없이 일명 ‘VIP 코스’로 빠져나갔지만, 박 행장은 20분여를 기다려 입국심사를 받았다. 한 달 뒤 은행 인사에서 김씨는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국내 지방 지점으로 발령받았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공항 의전에 사활을 건다. 한 대기업 영국법인장이던 박모씨는 10여년 전 전용기를 타고 온 회장을 태우기 위해 공항 활주로까지 앰뷸런스와 승용차를 몰고 들어갔다. 공항 측과 관계가 좋았던 그는 “회장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회장은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차를 탈 수 있게 되자 매우 만족해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다른 해외 법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어떻게 차를 타고 활주로까지 들어갔냐”며 낙담한 것이다. 일부 법인은 공항 보안담당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각종 물품을 건네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항 의전은 직급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한 중견기업에서는 회장이 귀국하는 시간에 맞춰 20~30명에 달하는 직원을 공항에 대기시키곤 한다. 임원뿐 아니라 부·차장급까지도 ‘회장님 마중’에 동원된다. 귀국 시간은 대부분 이른 새벽이다. 이 회사의 박모 부장은 “조만간 회장님의 해외 출장이 있을 것 같다는 소문이 돈다”며 울상을 지었다. “경쟁사 회장님은 혼자서도 잘 다니던데, 가끔은 우리 회장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의전은 자발적으로 했을 때 더 멋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는 장례식·결혼식도 ‘일’
직장에서는 경조사도 업무의 일환이 된다. 건설업체 총무부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은 ‘장례식장 지원’이 큰 골칫거리다. 회사 임원이 상(喪)을 당하면 매번 지원을 나가야 하는 관례가 있어서다. 조문객맞이, 신발 정리와 같은 일을 하다보면 어느덧 새벽까지 시간이 훅 흘러가 있다.
가장 괴로운 점은 장례식 의전에는 정해진 시간이 없다는 것. 데이트 약속을 앞두고 급히 불려나간 통에 화가 난 여자친구를 달래느라 고생한 적도 여러 번이다. 김 과장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임원의 상가까지 지원을 나가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선배들은 ‘우리도 그래왔다’며 막무가내로 지시하는데, 혼자 빠질 수도 없고 피곤하다”고 말했다.
상사를 위해 지방 장지까지 따라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직원 사이에선 불만이 많지만 행여나 불똥이 튈까 실제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다. “어쩌겠어요. 가욋일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더 받아요. 그냥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수밖에요.”
본의 아니게 ‘내 결혼식’에서까지 의전을 하게 된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사내 커플인 김모씨(33)와 박모씨(29)는 지난해 말 ‘악몽의 결혼식’을 올렸다. 비서로 일하는 박씨가 한 임원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것이 원인이었다.
결혼식 당일 신랑인 김씨는 손님을 맞는 와중에도 임원이 올 시간에 맞춰 식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도착 후 대기할 때는 신부인 박씨가 옆에서 말동무를 하며 음료를 접대했다. 식이 끝난 뒤에는 임원을 배웅하고 인사를 드리느라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단체사진 촬영이 지연되기까지 했다. 김씨는 “내 결혼식을 치른 것인지 임원을 행사에 모시고 간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며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탄했다.
스포츠 의전부터 화장실 의전까지
의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한 상사에서 일하는 정 과장은 최근 한 임원의 ‘의전 무용담’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실력보다는 의전으로 승진 가도를 달린 것으로 유명한 그 임원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의전 중 하나로 화장실 의전을 꼽았다. 상사가 화장실에 가면 자신도 화장실 앞까지 따라간다. 그리고 ‘볼일’을 마친 상사에게 준비한 손수건을 건네는 식이다. 그는 ‘진짜 볼일’을 보러 갈 때도 화장실에 다른 부서 등의 상사가 오지 않는지를 살펴 똑같은 서비스를 한다고 했다.
스포츠광인 회장을 모시는 한 대기업 비서팀 공 차장은 올림픽·월드컵 때마다 ‘자리 맡기’에 열을 올린다. 후원·협찬을 통해 VIP석 표를 받는 것은 쉽다. 문제는 이런 자리가 지정석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이다. 회장은 VIP석 중에서도 경기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공 차장은 직원 몇몇과 경기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 몰래 VIP석에 잠입하기로 했다. 좋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회장이 다가오면 슬며시 일어나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한 번은 해외의 올림픽 경기장에 미리 앉아 있다가 검문을 당해 쫓겨난 적도 있다.
한 중견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35)는 최근 골프 연습에 땀을 흘리고 있다. ‘골프 없는 골프 의전’에 지쳐서다. 지난해 김 대리는 한 달에 두 번씩 주말마다 골프장으로 출근했다. 그는 골프를 할 줄 몰랐지만, 영업에 도움이 된다는 부서장의 말에 무작정 부서장의 골프 의전에 나섰다. 그는 주말마다 부서장의 차를 운전해 골프장까지 함께 향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골프가 끝나면 업체들과 술자리를 가진 뒤 다시 부서장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래도 처음에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참았다. 다양한 업체 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고, 부서장 역시 그를 높게 평가해서다.
하지만 골프를 치는 동안의 시간은 점점 더 그에게 고역이 돼갔다. 칭찬을 받은 탓에 의전을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그는 아예 골프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김 대리는 “겨울이 되면서 골프 약속이 사라지니 지금은 매우 편해졌다”고 털어놨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외부 사람을 위한 의전에도 신경 써야 한다.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 다니는 정모씨(29)는 지난 1주일 동안 해외 바이어 의전을 하느라 녹초가 됐다. 유럽에서 온 바이어는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할랄 음식을 파는 식당을 수소문하는 등 식사 장소를 잡는 것부터 애를 먹었다. 서울에 처음 온 바이어의 ‘1일 가이드’도 정씨 몫이었다. 정씨는 서울 여행 가이드북을 구매한 뒤 바이어의 스케줄에 맞춰 서울 여행 동선을 짰다.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보고 싶다는 말에 서울 강남 한류거리도 일정에 넣었다. 정씨는 “서울에 20년 넘게 살았지만 이번처럼 서울 공부를 많이 한 건 처음”이라며 “외국인 바이어가 한국인보다 신경 쓸 게 많아 의전이 까다로운 것 같다”고 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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