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철 기자 ]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 설명하기가 참 힘들었죠. 그땐 ‘삼성과 LG의 나라’라고 얘기했어요. 한 수 아래로 대하던 현지인들이 금방 달리 보더라고요….”
1980~1990년대 외국에서 공부를 했거나 상사주재원 등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의 흔한 경험담이다. 88 서울올림픽 이전만 해도 한국을 아는 외국인은 드물었다.
국가 이미지도 ‘전쟁’ ‘폐허’ ‘기아’ 등 부정적인 것이 거의 전부였다. 자연히 해외에선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자부심을 심어준 건 기업이었다. ‘Korea’는 몰라도 값싸고 품질 좋은 ‘Samsung’ ‘LG’ ‘Hyundai’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국 기업의 성과는 기적"
대한민국 기업들이 일궈낸 성과는 기적에 가깝다. 케빈 켈러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는 “(삼성 등) 대기업의 성공은 21세기 기업 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위대한 성과”라고까지 했다. 선진국 양판점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처박힌 싸구려 TV나 만들던 ‘3류 기업’ 삼성이 소니와 파나소닉으로 대표되던 ‘일본 전자왕국’을 뛰어넘어 세계 정보기술(IT)산업을 주도하리라 누가 예상인들 했을까.
해외에선 한국 대기업이 혁신의 주체로 통하지만 안방에선 영 딴판이다.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고, 요즘에는 ‘절대악’ 취급을 받는다. 경영권 사유화, 불공정 거래를 통한 중소기업 수탈과 그로 인한 갑을관계의 부조리 심화, 노조를 부정하는 노동자 착취 경영….
우리 사회 한쪽에선 경제 침체와 불평등 등 ‘악(惡)의 근원인 재벌’을 무너뜨려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무책임한 반기업 정서가 판을 친다.
TV와 영화 등은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한다. 채널을 돌려도 안하무인 행동을 일삼는 비슷한 기업인 캐릭터를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인을 악한으로 그리지 않고는 시청률 경쟁을 벌이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방송계에 나돌고 있다.
정치권은 ‘재벌 손보기’ ‘기업 옥죄기’엔 선수다. 새 권력은 어김없이 ‘군기잡기’에 나선다. 규제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정치권력의 등쌀에 정권이 바뀌면 기업 총수들이 법의 심판대에 서는 일이 반복된다.
'악의 근원'으로 전락한 대기업
‘최순실 게이트’ 이후엔 반기업 정서가 상식 수준을 넘고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한국형 리코법을 제정해 삼성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리코법(RICO Act)은 미국이 1970년 마피아와 엘리트 조직범죄 등을 소탕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경영계는 “살인 마약밀매 매춘 무기밀매를 일삼던 마피아와 글로벌 기업을 동일시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볼멘소리만 겨우 낸다.
세계 각국은 친기업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땅에서 고용 창출만 한다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파격적인 법인세 인하와 기업 활동 관련 규제를 한 건 도입할 때마다 기존 규제를 두 개 없애는 이른바 ‘원 인, 투 아웃(one in, two out)’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반기업 정서와 기업 때려잡기가 이렇게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경제 발전의 동력인 기업가정신과 혁신을 기업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지도 모른다.
김태철 중소기업부장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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