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병훈 기자 ] “우리의 삶, 생각 등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걸 종이 위에 유형의 문자, 그림으로 남길 때 비로소 후세에 전해질 수 있어요. 인쇄는 무형의 소리를 유형의 문자와 그림으로 바꿔 후세에 남기는 숭고한 작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인은 ‘역사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죠.”
300여개 출판사의 책을 찍어내는 인쇄업체 현문자현의 이기현 대표(63·사진)가 밝힌 ‘인쇄 철학’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단양에서 무작정 상경한 것이 1969년. 인쇄소 조판공으로 취직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은 지 50년이 다 됐다. 1990년 설립한 현문자현은 하루에 책 10만권을 찍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이 대표가 자신의 인쇄업 인생을 기록한 자서전 《아버지의 치부책》(현문미디어)을 냈다.
“저를 인쇄업으로 이끈 건 어릴 때 우연히 본 컬러책이었죠.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인쇄의 질이 놀라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 컬러책에 반해 인쇄 기술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올랐어요.”
먼 친척이 운영하던 인쇄소에 취직한 그는 차근차근 기술을 배워 자수성가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사에 취직해 조판·인쇄 작업을 돕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에서도 1970년대에 잠깐 일했던 적이 있다. 1995년에는 출판사 현문미디어도 차렸다.
“지금은 인쇄공들에게 첨단 기술만 가르치지만 과거의 인쇄방식과 기술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인쇄기술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책을 썼어요. 인쇄기술자뿐만 아니라 문화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인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문화를 전수하고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출판과 인쇄 매체니까요.”
이 대표는 해외 시장 개척에도 관심이 많다. 2007년에는 출판사의 일본법인을 설립해 현문미디어에서 만든 책을 수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가 한류를 이끌었지만 앞으로는 지식의 보고이자 문화의 첨병인 출판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정신문화의 정수인 출판물이 활발히 수용될 때 진정한 한류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쇄기는 붓이고 인쇄기술자는 서예가’라는 말을 신념처럼 여기고 살아왔다”며 “지금도 기회가 있으면 업계 사람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며 자긍심을 가지라고 강조한다”고 했다. (264쪽, 1만3000원)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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