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보다 더 싫었던 영세민 '낙인'
아버지 일찍 여의고 형편 어려워져 신문 배달에 병아리 키워팔며 생계
왕복 14㎞ 걷고 기차 통학하며 학업
한양대 4년 장학금…고시 수석 합격
인생은 '무빙타깃'이라지만…
한때는 원치않던 인사에 속상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일해
방카슈랑스 도입·제3보험업 신설 등 굵직한 정책 짜며 '보험통' 우뚝
[ 박신영 / 윤희은 기자 ]
성대규 보험개발원장(50)과 만난 곳은 서울 신문로 근처의 추어탕집이었다. 성 원장은 추어탕을 한술 뜨기 전에 “고기 대신 먹게 된 음식”이라며 “어릴 때 고기를 거의 먹어보지 않아 지금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그는 대뜸 “영세민(零細民)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 원래 영세민은 가난하고 변변찮은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세금을 내지 못 할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영세민(零稅民)’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게 성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경북 영천 시골에서 날품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했다. 어머니와 삼남매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고 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도 채소를 먹었을 때 속이 더 편하다고 했다.
‘영세민’ 낙인이 싫었던 어린 시절
성 원장은 “1970년대까지도 시골은 다들 가난했고 기댈 언덕이 없었던 터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새벽에 역으로 나가 신문을 받아 배달하는 일은 기본이었다. 강아지와 병아리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영천에서 대구까지 두 시간가량을 기차로 통학했다. 기차역에서 학교까지 왕복 7㎞가 넘는 거리였지만 버스비 때문에 늘 걸어 다녔다. 성 원장은 “이런 얘기 들으면 사람들이 1950년대 태어난 이로 취급한다”며 웃었다.
가난보다 더 싫었던 것은 때만 되면 영세민 자녀로 낙인 찍혀야 하는 일이었다. 공부를 잘했고 자존감이 강하던 그는 때때로 불우이웃돕기 행사의 하나로 전교생 앞에 불려나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속옷이며 쌀을 받아야 할 때 너무나 괴로웠다고 했다. 영세민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른들이 미웠다.
성 원장은 고교 3학년 때 여동생이 불쑥 학교 앞으로 찾아와 울음을 터뜨렸을 때도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오빠를 위해 실업계 야간고에 진학한 동생이었다. “울면서 왜 자신은 실업계 학교를 다니며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할 때 정말 괴로웠다”는 그는 “당장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라도 취직하는 게 옳은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한참 얘기를 이어가던 성 원장은 목이 탄다며 막걸리를 찾았다. 담백한 추어탕 국물과 달짝지근한 막걸리의 궁합이 잘 맞았다. 인터뷰 자리란 말에 식당 주인이 메뉴에도 없는 굴전과 호박전도 내놨다.
한양대 경제학과에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성 원장은 곧바로 고시반에 들어갔다. 그는 “고시반에 들어가야 기숙사가 제공돼 생활비를 아낄 수 있었다”며 “고시 공부도 생계를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홍남기 미래창조과학부 차관과 최희남 국제통화기금(IMF) 이사가 그의 고시반 선배들이다. 성 원장은 1989년 제33회 행정고시에 수석합격했다.
“인생은 무빙타깃(moving target)”
성 원장은 행시에 합격할 때만 해도 옛 재정경제원 세제실 혹은 예산실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나처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세금제도를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성 원장은 ‘보험 3수생’으로 유명하다. 재경원 시절 보험제도담당관실에서 사무관으로 일했고 1990년대 말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보험과에 몸담았다. 주(駐)프랑스 한국대사관 재경관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금융위원회 보험과장을 맡았다. 성 원장은 “금융위 보험과장을 맡았을 땐 ‘이게 내 운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했다”며 “정한 목표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인생은 ‘무빙타깃’이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곳으로 인사가 나지 않아 속이 상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불만에도 그의 손을 거친 굵직한 보험정책이 적지 않다. 2003년 보험업법 전면 개정 작업을 주도하며 한국에 처음으로 방카슈랑스를 도입했다. 제3보험업 분야 신설도 그가 주도했다. 그는 “당시 법 개정을 위해 준비해놨던 보험업법 개정 시안만 50개에 달했다”고 말했다.
보험과장 시절에는 실손의료보험 본인부담금을 처음 도입해 소비자가 비용의 10%를 내도록 했다. 당시 보험사와 설계사, 소비자의 반대가 심했지만 도덕적 해이를 방지해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줄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밀어붙였다. 공무원 시절 쌓은 이런 전문성 덕에 성 원장이 지난해 11월 보험개발원장에 취임할 때도 낙하산 논란이 거의 없었다.
성 원장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에 대한 연구와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일본이 연구해놓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례만 해도 엄청나다고 전했다.
보험개발원장을 맡은 뒤 일본 보험 연구는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일본은 저금리와 고령화를 먼저 겪으며 생명보험사 구조조정을 거친 데다 다른 나라 보험제도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어서다. 성 원장은 “국내 보험 전문인력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맞는 보험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무원은 원리원칙 지켜야”
시간이 지날수록 말하는 성 원장보다는 듣는 기자의 추어탕 그릇이 빨리 비어갔다. 속도를 맞추기 위해 한술 한술 천천히 들었다. 미꾸라지는 곱게 갈렸으나 탕에 들어간 양이 많아 씹을수록 색다른 맛이 났다. 굴이 들어간 김치는 시원하면서도 비린 냄새가 없어 이 또한 막걸리 안주로 제격이었다.
성 원장에게 스스로를 어떤 공무원으로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는 “융통성 없다는 평도 들었지만 원리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은 끝까지 지켰다”고 말했다.
성 원장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 재경원 보험제도담당관실 사무관으로 일할 때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했다. 당시 보험감독원이 지방 보험사의 분식회계를 적발해 재경원에 징계를 요청했다. 담당사무관이던 성 원장은 최소한 대표 해임 이상의 징계가 필요하다고 윗선에 보고했다. 윗선은 조심스러워했다. 규모만 다를 뿐 어느 회사든 조금씩 분식이 있다는 논리였다. 정치권 등에서 징계 수위를 낮춰달라는 부탁도 들어왔다. “사무관이 너무 나선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소신을 밀어붙였다.
보험사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새 경영진이 선임됐고 서너 달이 지난 뒤 해당 보험사는 이전보다 세 배 이상 큰 규모의 분식회계를 자수했다. 이후 보험사 대주주는 증자를 했고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 투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일을 두고 “혼자 간직해 온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성 원장은 이윤재 전 청와대 재정경제비서관과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전 기획재정부 장관)를 존경하는 상사로 꼽았다. 그는 “이 전 비서관은 재경원 경제정책국장으로 있을 때 같이 일하며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배웠다”고 했다.
이 전 비서관은 예산총괄과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실장, 재경원 경제정책국장 등 요직을 거쳐 외환위기 직후 청와대 재정경제비서관을 맡아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등 경제정책의 핵심 역할을 했지만 쉰 살이 됐을 때 미련 없이 명예퇴직해 주목받았다. 원칙주의자면서 합리적인 성품으로 따르는 후배가 많다. 최근에는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 원장은 “이 전 비서관처럼 은퇴 이후엔 원 없이 읽고 쓰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도 많이 다녀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머니와의 여행 이야기가 나오자 인터뷰는 그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그와 가족이 가난으로 고생하던 이야기였다. 성 원장은 “젊은 시절엔 가난한 과거를 얘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자랑도 아니거니와 약한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기도 싫었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털어놓으니 마치 ‘커밍아웃’한 기분”이라며 “힘들던 시절로부터 이제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젊은 세대들에게 “‘흙수저의 틀’ 안에 갇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 보험개발원, 43개 회원사에 보험료율·통계 서비스 제공
보험개발원은 1983년 12월 설립된 한국손해보험요율산정회가 모태다. 자동차 선박 주택 등에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계산해 이를 요율로 수치화하는 작업을 했다. 한국손해보험요율산정회는 1989년 손해보험 및 생명보험을 아우르는 보험개발원으로 재출범했다. 현재 18개 손해보험회사와 25개 생명보험회사가 회원사다.
보험개발원은 통계자료를 활용해 보험사별 맞춤형 통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보험사들이 재보험에 가입할 때 참조할 수 있는 다양한 요율을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1992년에는 자동차의 적정한 수리비 산정 등을 위해 자동차기술연구소를 부속기구로 설치했다. 1995년에는 보험연구소를 신설했다. 보험연구소는 2008년 보험연구원으로 분리됐다.
성대규 원장의 단골집 풍미추어탕
영호남식 섞은 33년 추어탕 전문점…걸쭉한 국물 일품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는 ‘풍미추어탕’은 33년 된 추어탕 전문 식당이다.
메뉴는 추어탕과 예약이 필요한 미꾸라지 튀김이 전부다. 미꾸라지를 푹 삶은 뒤 갈아 조리하는 것은 경상도 식이지만, 된장이 들어간 걸쭉한 국물은 전라도 식이다. 우거지와 버섯, 숙주도 듬뿍 들어가 있다.
반찬으로 나오는 무김치도 추어탕만큼 맛있다. 식당 입구에서 김치를 담그기 위해 새로 사다 놓은 싱싱한 무들을 곧잘 볼 수 있다.
추어탕은 취향에 따라 산초가루를 듬뿍 넣어 먹어도 좋다. 가격은 1만원. 미꾸라지 튀김은 양에 따라 3만원과 5만원. (02)736-0868
■ 성대규 보험개발원장
△1967년 경북 영천 출생 △1985년 대구 능인고 졸업 △1989년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1989년 33회 행정고시 합격 △2001년 미국 유타대 로스쿨 졸업 △2009년 금융위원회 보험과장, 은행과장 △2012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 △2014년 7월 고위 공무원 명예퇴직 △2016년 8월 법무법인 태평양 외국변호사 △2016년 11월 보험개발원장
박신영/윤희은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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