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제 우리가 잘못 다뤘다"…'저승사자' IMF의 변신

입력 2017-02-24 18:27   수정 2017-02-25 06:03

이상은 기자의 Global insight

"부채 해결 잘못된 접근" 반성
금융개방·재정건전성에 집착
신자유주의 재평가 움직임도

잘못 인정하는 유연성에 눈길



[ 이상은 기자 ] ‘국제통화기금’이라고 하면 어색하고, ‘아이엠에프(IMF)’라고 불러야 입에 착 붙는다. 1990년대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다고 하면 뭐가 문제였는지 뚜렷하지 않고 ‘IMF 위기를 겪었다’고 해야 느낌이 딱 온다. IMF는 ‘저승사자’고, 뭔가 잘못돼 저승사자가 온 것이라는 스토리가 구성된다.

한국 사회는 1997년부터 IMF가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대가로 요구한 시장 개방, 긴축과 재정 건전성 처방 등을 기둥 삼아 많은 것을 바꿨다. 이후의 경제정책은 IMF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강력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외환보유액이 3740억달러(한국은행 1월 말 기준)에 달하는데도 두려움은 여전하다.


그러나 정작 IMF는 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IMF는 노선을 바꾸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 외환위기 때 긴축을 강요한 것이 잘못됐다고 인정했을 뿐 아니라, 무조건 부채비율이 낮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소득 불평등을 감수해야 하는 부산물이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려는 관점도 강해지고 있다.

IMF가 지난 6일 발표한 그리스 보고서는 IMF가 참여한 그리스 구제금융이 완전히 가닥을 잘못 잡았다고 시인하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그리스 구제금융 관련 기존 IMF의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했다. 그리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중이 낮아지기는커녕 되레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고, 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이 채무조정을 반대하리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오는 7월 70억유로 채무 만기가 돌아와 추가 자금 지원을 받아야 하는 그리스와, 그리스에 돈을 대 줘야 하는 유럽은 보고서가 나온 뒤 벌떼처럼 IMF를 비판하고 나섰다. IMF가 돈을 안 대려고 딴소리한다는 것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도 “그리스 국민을 놓고 (유로존 대표 국가인) 독일과 IMF가 불장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에 정치적인 함의가 담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IMF가 최근 수년 새 급격히 ‘자아성찰적’으로 바뀐 흐름 자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5월 조너선 오스트리 IMF 조사국 부국장 등이 펴낸 ‘신자유주의는 부풀려졌나(oversold)?’ 보고서는 IMF가 지난 수년간 내놓은 여러 반성문 가운데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금과옥조로 삼아온 금융시장 개방과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이 경우에 따라선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금융위기 후 달라진 경제 환경과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등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학자들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IMF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평가가 많다.

그리스 구제금융에 대한 자아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찰스 위플로즈 제네바국제대학원 국제경제학 교수는 지난 17일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포털사이트(voxeu.org)에 게재한 글을 통해 “IMF가 자신의 정책을 스스로 평가하는 보고서를 낸 것만으로도 칭찬받아야 한다”고 박수를 보냈다.

한국 사회에선 윗사람일수록, 권력자일수록 자신이 잘못한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권력자가 젊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가 떨어지고, 한 번 틈을 보이면 계속 공격받을 것이라고 여긴다.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인 ‘갑(甲)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겁주고 몰아칠 때하고는 완전히 딴판인 IMF에 배신감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손에 쥐고 흔든 그 무서운(!) IMF가 생각보다 유연하게 자기 길을 바꿔가고 있다는 것은 신선하다. 우리도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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