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종태 기자 ] 2012년 2월의 일이다. 4·13 국회의원 총선거와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복지공약을 쏟아냈다. 그러자 기획재정부가 일을 냈다. 공약에 들어가는 모든 재원을 따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정치권 요구를 다 실행에 옮긴다면 5년간 220조~340조원이 든다. 세금 대폭 인상이 불가피하며, 국채도 발행해야 한다. 국가 재정이 재앙에 빠질 것이다.”
한마디로 복지공약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감내하기 어려운 만큼 거둬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국회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셈이다. 정치권이 발칵 뒤집어졌다. 여야 중진 의원들이 당시 박재완 장관한테 득달같이 전화했다. “누가 이걸 주도해 만들었냐.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해댔다.
5년 전 기재부의 '용기'
기재부의 반기는 당시 예산과 재정을 총괄하던 김동연 2차관(현 아주대 총장)이 기획한 것이었다. 김 차관은 2011년 말 예산실과 경제정책국 간부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복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내부에서도 반대가 적지 않았다.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김 차관은 “나중에 문제가 되면 ‘차관실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따라한 것일 뿐이다’고 답해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밀어붙였다.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명색이 재정당국으로서 대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공약을 하나하나 해부해가며 소요 재원을 분석하고 공약에서 제시한 재원대책의 현실성을 치밀하게 따졌다. 몇날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뒤늦게 알려진 얘기지만, 정치권의 거센 반발에 김 차관은 당시 청와대에 사의까지 표명했다. 어차피 옷 벗을 각오로 시작한 일이니만큼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정치권의 복지공약 경쟁은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다. 한쪽에서 아동수당 10만원 주자는 공약을 내놓으면, 다른 쪽에선 30만원 주자는 공약이 나온다. 누가 더 세고, 더 자극적이고, 더 많은 돈을 주는 공약을 내놓는지 경쟁해 보자는 것 같다.
공약 감시 포기는 '배임'
5년 전과 다른 점은 감시자가 없다는 것이다. 기재부는 요즘 다른 일로 바쁘다. 소비대책, 투자촉진책을 내놓은 데 이어 골프산업 육성책, 일자리 대책 등을 줄줄이 준비 중이다. 정권 말기 레임덕에도 ‘우리가 국가 경제의 보루를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그래 보이진 않는다. 정부가 내놓거나 고민 중인 정책은 죄다 단기 대책이다. ‘언발에 오줌누기’ 식이거나 ‘우리는 이만큼 일하고 있다’는 시위용으로 억지로 쥐어짜낸 것이 상당수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나라를 결딴낼지도 모르는 공약을 분석해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기 대선이라도 치러지면 차기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출범한다. 지금 나온 공약들은 완충이나 조율 과정 없이 그대로 실행될 가능성이 높다. 미리 걸러주지 않으면 경제의 폭탄이 돼 돌아올 수밖에 없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그의 책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임에도 하지 않고 있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임에도 하고 있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임행위”라고 했다. 정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지금 배임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종태 경제부장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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