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젊은 항일 영웅들
1938년 우한에 모여 독립군 부대 창설
곳곳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흔적
"왜놈 상관 쏴 죽이고 총 메고 오라"
낡은 건물 흙벽에 그날의 결기 남아


국·공합작 깨지자 타이항산으로 들어가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흔적은 크게 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자좡시 남쪽의 짠황현 황베이핑촌과 위안스현의 후자좡촌이 한 묶음이다. 한단시중심가의 진지루위 열사능원과 서현 일대다. 서현 일대에는 213번 성도를 따라 유적지들이 이어진다.
1938년 10월10일, 남쪽으로 800㎞나 떨어진 우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왜 이곳에서 전투를 하게 됐을까.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총대장은 김원봉이었고 100여명의 대원으로 출발했다. 조선의용대는 애당초 전투부대가 되어 화북을 거쳐 만주로 진출한다는 동북노선이었다. 그러나 창설 초기에는 중국과의 합의에 따라 국민당 전구의 정치선전에 투입된 탓에 젊은 대원들은 점차 의욕이 쇠퇴했고 장제스의 항일 의지에 대해서도 회의하기 시작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위태로워지자 김원봉과 본대는 충칭에 남기로 하고, 조선의용대 주력 80여명은 그해 6월 황하를 건너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타이항산이었다.
김일성 독재 반대한 열혈문인 김학철
타이항산에서 40일간의 대토론을 거쳐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1, 2구대를 화북지대라는 편제로 개편했다. 조선의용대가 충칭 본대의 지휘를 받는 형식은 유지했지만 팔로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변화한 것이다. 실질 주도권이 김원봉, 윤세주 등에서 최창익, 진광화 등 사회주의 운동가로 넘어간 것이다.
황하 북상 이후 1942년까지 치열한 무장선전과 대적전투, 그리고 일본군 지역에서의 지하활동이 전개됐다. 이런 와중에 1941년 12월 후자좡촌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네 명이 전사했다. 김학철은 부상당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네 명의 시신은 황베이핑촌에 묻혔다. 후자좡전투는 중국의 소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중국에서 큰 의미를 부여한 전투다.

조선의용대의 흔적을 더욱 진하게 남긴 전투는 1942년 5월이었다. 팔로군 참모장 쭤취안(左券)과 조선의용대의 핵심인 윤세주 진광화가 전사했다. 팔로군 측에서 성대한 추모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이 두 사람의 묘는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능원에 있다. 진지루위는 각각 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 등 네 성의 약칭이다.
의열단의 핵심 진광화, 윤세주

윤세주는 인민해방군 묘역 가운데 있다. 가로 1m 정도가 되는 비에 세로 3m 석판으로 덮은 묘가 예사롭지 않다. 윤세주는 김원봉과는 생가부터가 앞뒷집인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둘 다 의열단 창단에 참여했다. 윤세주는 창단 직후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이육사와 함께 난징으로 가서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로 교육을 받았다. 육사는 귀국해서 활동을 했고, 윤세주는 난징에 남아서 군정학교 2기의 교관을 맡았다. 이후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을 거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핵심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독립운동 연구자 가운데 윤세주를 ‘조선의용대의 영혼’ 또는 ‘김원봉의 복심’이라고 묘사하는 학자도 있다.
윈터우디촌 남쪽 끝으로 가면 조선의용군이 당시 담장에 써놓은 우리말 구호가 아직도 남아 있다. 덧칠을 해서 선명하다. 우에서 좌로 가는 횡서로 쓴 것이라 거꾸로 읽는 것 같지만 오히려 당시의 작풍이 실감 난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는 것도 있고 “왜놈의 상관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는 구호도 있다.
산시성=윤태옥(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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