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욱 < 서울대 경영대 교수 >
자동차산업은 제조업이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한국 제조업 부가가치의 12%를 담당하고 있으며, 총 수출의 13.2%, 제조업 고용의 11.7%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노동 비용 및 낮은 생산성 그리고 노동의 유연성 부족으로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하락하고 있다는 평가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실제 결과로도 국내 자동차 생산 및 수출이 위축되고 있으며 덩달아 국내 자동차 부품산업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동차산업의 현재 상황을 둘러보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여전히 선진국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경쟁력만 있다면 앞으로도 자동차산업은 한국 경제성장의 핵심 산업으로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산업은 여러 경쟁력 약화 요인에 노출돼 있다. 경쟁력 약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고질적인 고비용 저(低)생산성 구조다. 이는 자동차산업뿐만 아니라 국내 제조업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고비용 저생산성 구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원가관리 방안은 없을까.
제조업체의 원가 상승 요인을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구매’라고 입을 모은다. 구매 활동은 기업이 생산하는 재화의 원재료를 구매하는 단순한 활동에서부터 기술력,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적극적인 구매 개념으로 변해왔다. 경영의 효율화와 원가 절감을 위한 아웃소싱(기업 업무의 일부 프로세스를 경영 효과 및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방안으로 제3자에게 위탁해 처리하는 것), 글로벌 소싱(구매활동 범위를 범세계적으로 확대해 외부조달 비용 절감을 시도하는 구매전략)은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된 구매활동은 제품의 원가를 크게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결국 최고의 원가 관리 방안은 구매를 관리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AT커니는 기업의 전략적 구매의사 결정을 돕기 위해 ‘구매 체스판(The Purchasing Chessboard)’이란 전략적 의사결정 툴을 개발했다. AT커니의 구매 체스판은 공급자와 구매자 관점에서 각각의 영향력을 판단해 네 개의 면으로 나눈다. 이 네 개의 면은 △공급자의 영향력이 구매자보다 높은 경우 △구매자의 영향력이 공급자보다 높은 경우 △공급자와 구매자의 영향력이 둘 다 낮은 경우 △공급자와 구매자의 영향력이 둘 다 높은 경우로 나뉘게 된다. 각각의 경우를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공급자의 영향력이 구매자 영향력보다 높은 경우다. 이런 상황에 있는 구매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술력이 높은 공급자와 상대해야 하는 구매자는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할 별다른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구매자는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 기업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리스크를 관리하고, 기술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생력을 키워야 하며, 스스로 혁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구매자의 영향력이 공급자 영향력보다 큰 경우다. 쉽게 얘기해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많은데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대부분의 구매자는 원가 절감을 위해 여러 공급자를 서로 경쟁시키는 일반적인 경매와 입찰 형식을 통해 구매 단가를 낮추려고 노력한다. 해외 공급 시장을 검토해 글로벌 소싱을 할 장소를 물색하기도 하고 목표 가격을 통해서 원하는 가격에 물품을 공급받을 수도 있다.
그다음은 공급자와 구매자의 영향력이 모두 높은 경우다. 이 상황에는 공급자와 구매자 간 줄다리기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치 사슬(value chain)’을 관리해 공급자와 구매자 간 전략적 협업(協業)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로가 상생하면서 발전해갈 수 있는 방향인 장기계약과 기술협력 등에 주력하고 힘겨루기를 지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구매자와 공급자의 영향력이 모두 낮은 경우다. 이 상황에서는 정보와 관리, 통합이 구매원가 절감의 키워드가 된다. 먼저 얼마만큼의 수요가 필요한지에 대한 정보 수집이 내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동종업계의 기업과 연합해 통합적으로 구매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구매자 영향력을 높여나가며 규모의 경제 달성과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를 국내 자동차 부품시장에 적용해보자. 국내 자동차 부품 제조사는 독일의 자동차 부품 제조사와는 그 입장이 다르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 제조사는 ‘히든 챔피언’(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 분야의 글로벌시장을 지배하는 우량 기업)으로 불릴 만큼 공급자면서도 그 공급 영향력이 강하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 부품 제조사는 독일의 부품 제조사에 비해 기술 수준도 떨어지며, 전문 인력 확보 역시 힘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값을 받고 부품을 공급하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을 구매 체스판을 적용해 설명해보자. 국내 자동차 부품 제조사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구매자 영향력보다 낮기 때문에 을(乙)의 입장에서 세계 각국의 경쟁업체와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며 원가에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는 높은 노동 비용 및 낮은 생산성과 노동 경직성 등으로 고통받고 있으니 진퇴양난의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내 자동차 부품 회사는 장기적으로는 공급자로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 개발에 힘써야 할 것이며, 단기적으로는 구매업자인 자동차 제조업체와의 협업을 통한 상호이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구매자일 때와 공급자일 때의 영향력을 적절히 파악할 수 있다면 최적의 구매 전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제조업체는 원가절감으로 이어져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시장은 움직이는 생물" 구매도 맞춤 전략 짜라
‘구매 체스판’은 글로벌 컨설팅회사 AT커니가 고안한 구매전략 툴이다. ‘가격을 쥐어짜는’ 과거의 단순한 구매전략이 아니라 공급자와 구매자가 처한 환경, 즉 이 둘의 영향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매전략을 제안한다. AT커니가 세계적으로 수행한 구매 프로젝트를 통해 축적한 노하우가 녹아 있다.
구매 체스판은 공급자와 구매자 간 영향력 정도에 따라 크게 네 가지 기본 시나리오별로 구매 전략을 제안한다. 이 네 가지 주요 구매 전략에 따라 16개의 기본 접근법을 도출하고, 다시 이를 기반으로 총 64개의 독립적이고 차별화된 구매 방법론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급자보다 구매자의 영향력이 크면 공급자 간 가격경쟁을 유도하는 게 유리하다. 공급자 망을 넓히기 위해 글로벌 공급시장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목표가격을 설정하고 역(逆)경매도 활용하는 등 공급자 간 가격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이 효과적이라고 제안하는 식이다.
공급자와 구매자로서 영향력의 위치는 주기적으로 재검토해야 하고 그에 따라 구매전략도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장은 고정적이지 않고 늘 움직이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김수욱 < 서울대 경영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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