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호 기자 ] 벌써 5개월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12월부터 해외 경영활동을 접었다. 작년 11월 말 중동 방문이 마지막 해외출장이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사정은 더 딱하다. 비자금 수사를 받던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출범한 12월 이후 지금까지 출국금지 상태다. 7개월이나 발목이 묶여 있다. 일본을 오가며 ‘셔틀 경영’을 하는 등 1년의 절반가량을 해외에서 보내던 그다.
‘비선 실세’ 최순실 씨 측에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번주부터 본격적으로 재판을 받는다. 현대자동차 포스코 KT 등의 경영진도 법정에 불려 다니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구속됐지만, 기업들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댈 언덕 없는 기업들
검찰 칼날 아래 놓인 일부 대기업은 ‘잔인한 4월’을 맞았다. 최 회장은 지난해 1기 검찰 특별수사본부에 이어 지난달 다시 꾸려진 2기 특수본에도 소환돼 밤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추가 수사 여부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수사 중이다. 필요하면 (기업 관계자를) 부른다”는 모호한 말을 흘린다.
같은 혐의를 놓고 한 기업의 총수를 두 번씩이나 조사하고도 “아직 수사할 게 더 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더 수사할 게 남은 것인지,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지 모를 일”이라는 불만이 재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비리 척결을 위한 검찰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제와 고용을 책임지는 기업의 시간도 소중하다. 국내 대기업 총수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1박2일이나 2박3일 일정으로 해외출장을 다녀오는 일이 적지 않다. 가까운 곳은 당일 아침에 출국했다가 저녁 늦게 오기도 한다.
‘관시’(關係·인간관계)가 중요한 중국엔 수시로 오가며 현안을 챙기고 유력 인사들과 스킨십을 한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초기에 기업 총수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더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4월 위기설 잠재워야
대통령 선거(5월9일)를 앞두고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광풍이 불어도 기업들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그나마 목소리를 내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려 ‘무장해제’됐다. 대통령과 여당이 없는 상황에서 생명이 한 달여 남은 과도 정부에 기댈 언덕이 있을 리 만무하다.
‘태블릿PC 문건 파동’이 불거진 지난해 10월 하순부터 6개월 가까이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반 국민까지 대한민국 전체가 ‘최순실 게이트’에 매몰돼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그러는 사이 ‘4월 위기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이달 환율보고서를 발표하는데, 한국이 환율조작국 명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일본과의 외교활동은 사실상 끊겼다. 북한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대우조선은 이달 대규모 회사채를 상환해야 한다.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죽은 땅에 라일락을 키워내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번 4월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지도 모른다.
이건호 증권부장 leek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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