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 없는 안보공약은 여전히 뒤죽박죽
북핵 위협 제거할 구체적인 공약 내놓아야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이번 대통령선거 경쟁 양상을 보면 한국의 정치지형이 변해도 크게 변한 것 같다.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던 구도가 무너지고 진보와 진보가 양강 구도를 형성하면서, 진보가 보수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지난해 4·13 총선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부동층이 가장 많다는 서울에서조차 진정한 부동층은 많지 않았다. 여론조사에서는 무당파라고 답하는 사람이 30% 정도였지만 실제 투표행위를 살펴보면 이 가운데 70% 이상이 특정 정당에만 투표했다. 이전 몇 차례 선거에서 한 번이라도 정당을 바꿔 투표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10%에도 미치지 않았다. 지방의 경우 이보다도 더 적었다. 자연히 선거는 진지전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 진지전에 균열이 생긴 게 지난 국회의원 선거였다. 당시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에 넌더리를 내던 일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이념이나 지역의 굴레에서 벗어나 과거의 지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에 투표했다.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더욱 많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심리적 봉인에서 해제됐다. 이들은 더 이상 보수 정당이나 보수 후보라고 해서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후보의 공약만이 아니라 당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서 전략적으로 투표할 태세가 돼 있다. 보수를 표방하는 후보들이 지리멸렬한 것도 이 때문이고, 특정 후보의 대세론에 맞설 만큼 또 다른 후보가 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대선 레이스가 진보 후보의 양강 구도로 형성되면서 일견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력 후보들이 과거의 말을 뒤집으면서까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된 변화다. 안철수 후보는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당론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고, 문재인 후보도 사드 배치 반대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보수 정치세력은 죽어도 보수의 가치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관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실 사드 배치 문제는 안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처한 엄혹한 안보 환경에 비춰 훨씬 더 포괄적인 안보공약이 필요하다.
우선 북한의 핵 위협은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다섯 차례 핵실험을 통해 북한의 핵 능력은 미사일 탑재가 가능할 정도로 경량화가 이뤄졌고 운반체 개발도 지속돼 오래지 않아 핵무기 실전 배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주변 4강 간의 관계도 매우 복잡미묘하고 불안정한 상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후보들의 안보 공약은 목표와 기조를 명백히 한 다음 이를 달성할 구체적인 수단을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보들이 안보와 관련해 내놓은 공약을 보면 목표와 수단이 혼재돼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일관하는 기조가 결여돼 있어 상충하는 공약 사항도 많은 게 현실이다. 한 후보는 한·미 확장 억지력을 구축하겠다면서 그 핵심 요소인 사드 배치에는 반대하고 있다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드 배치를 수용하겠다고 말을 바꾸고 있다.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한다면서도 전시작전권은 조기에 환수하겠다고 한다. 전시작전권을 환수한다면서도 혹은 국방연구개발비를 늘리겠다면서도 필연적으로 필요한 국방비 증액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양강 후보들이 진영논리에서 조금이나마 후퇴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사드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에 불과하다. 다른 방어 능력도 길러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핵 위협 자체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안보와 관련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보수표를 의식해 말 바꾸기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면 국가와 국민에게 큰 죄를 짓는 일이다.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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