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D-19] 돈 쓸 공약 쏟아내면서…세금엔 '비겁한 침묵'

입력 2017-04-19 17:48  

소득자 절반이 세금 한 푼도 안 내는데
면세자 축소 '고통 분담'은 아무도 언급 안해

박근혜 정부 '증세 없는 복지' 비판하더니…대선후보들 '닮은꼴'



[ 이상열 기자 ]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주요 후보들이 복지를 늘리기 위해 나라 곳간을 헐겠다는 공약을 앞다퉈 쏟아내고 있다. 복지는 한 번 늘리면 좀체 줄이기 힘들다. 공약 한 건에 많게는 수조원이 필요하다. 재원은 세금에서 나온다. 하지만 대선후보 어느 누구도 세금을 어디서 얼마를 더 거두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있다.

세금 얘기를 함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표 떨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한 세제 전문가는 “수백만, 수천만명이 영향을 받는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증세에는 침묵하고 투표권이 없거나 극소수에 불과한 법인과 고소득자 대상의 세금 인상 방안만 언급한다”며 “애초부터 재원 마련 방안의 현실성이 없거나, 비겁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

대선후보들의 복지 공약은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느냐’의 경쟁이다. 아동수당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0~5세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월 1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모든 초·중·고교생 가정에,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0~11세 아동 가정으로 대상을 넓혔다. 후보별로 3조~7조원이 들어갈 것이란 게 재정당국의 추산이다.

대선후보들은 65세 이상 노인(소득 하위 70%)에게 월 최대 20만원을 지급하는 기초연금도 내년부터 월 25만~30만원으로 늘리고 대상자도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럴 경우 내년에 4조~8조원, 2021년엔 7조~10조원의 예산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란 추산이 나온다.

하지만 재원에 대해선 침묵이다. 문 후보는 19일 KBS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복지정책에 필요한 재원 대책을 묻는 심 후보의 질문에 “정책본부에서 167조원 규모로 발표했다”며 즉답을 피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정부 재정이 투명하지 못한 것을 고쳐야 하고 누진제가 제대로 적용되게 바꾸고 그다음에 증세”라며 증세 문제를 피해 갔다.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현실성 없다고 비판하던 후보들이 표 앞에서 비슷한 프레임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대선후보들의 복지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재원 마련 대책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한국은 법인세수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2%(2015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9%)보다 높은 국가다. 반면 GDP 대비 소득세수는 4.4%로 OECD 평균(8.6%)의 절반에 불과하고 부가세수도 7.1%로 OECD 평균(11.2%)보다 크게 낮다.

많은 전문가가 증세를 해야 한다면 소득세나 부가세를 높여야 한다고 제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에서 연말정산 파동 후 각종 공제 혜택이 급증한 탓에 근로소득자 중 면세자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넓은 세원과 낮은 세율’이라는 조세 원칙에서 볼 때도 면세자를 줄이는 정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는 대선후보들도 잘 알고 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선거 전에는 “면세자 축소가 맞는 방향”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거 국면이 본격 시작되자 어느 누구도 면세자 축소 방안은 얘기하지 않는다. 소득세나 부가세 증세 방안도 대부분 함구하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 등은 소득세율 인상 공약을 내놨지만 부자를 대상으로 한 최고세율 인상에 집중돼 있다.

법인세도 방향이 모호하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와 심 후보가 명목세율 인상을 주장할 뿐 문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비과세·감면 등을 정비해 실효세율 인상을 우선 추진하고 명목세율 인상은 추후 고려한다는 입장이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선후보들이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득세나 부가세 증세 계획은 외면하고 투표권이 없는 법인세 인상 공약만 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대선후보들이 보편적 복지제도를 도입하려면 이를 충당할 수 있는 증세와 재원 마련 방안도 선거 공약으로 명확하게 제시하고 국민의 평가를 받는 것이 정도”라고 말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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