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비 지음 / 윤영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580쪽│1만8000원
[ 서화동 기자 ] “엄마, 평일 오후에는 블랙실크를 입고…일요일에는 블랙새틴 드레스를 입어. 침대보 같은 허접한 티 나는 거 말고 진짜 새틴 말이야.”
영국 소설가 샬롯 브론테가 1849년에 발표한 ‘셜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당시 여성들이 꼽는 최고의 드레스는 블랙실크였다. 하지만 실크보다 새틴이 더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딸이 엄마한테 낡은 가운은 더 이상 입지 말라며 새틴을 권한 것이다. 유행색은 단연 ‘블랙’이었다. 숄, 벨벳망토, 모피재킷, 실크팰리스에 검은 색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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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교수는 이 책에서 검은색의 역사와 문화사적 의미를 추적한다. 기원전 100만년 전 인류의 조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인디언 등 인간이 검은색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하고 의미를 부여했는지 짚어 나간다. 색깔, 패션, 종교, 인류학, 예술 등 다양한 맥락에서 변주되는 검은색의 모습을 광학, 물감, 언어, 개념적 영역 등 다양한 범주를 넘나들며 탐구한다.
저자의 검은색 역사기행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조상의 피부는 당연히 검은색이었다. 인류가 처음 그린 그림도 검었다. 1만7000년 전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천장 벽면에 그려진 것은 거대한 검은 암소다. 고대 아프리카산 검은 목재의 세계적인 인기, 고대 지중해 사람들이 거래한 검은색 사치품, 남녀 불문 달고 다녔던 눈 화장먹, 파피루스에 썼던 검은색 상형문자 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검은색은 예로부터 공포와 죽음을 상징했다. 전 세계 신화에는 검은 신이 자주 등장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밤의 여신 ‘노트’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끈다. 켈트 신화 속 전쟁의 여신 ‘모리유’는 검은 까마귀로 변신해 시체 위를 맴돈다. 검은색과 신성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검은색이 죄를 상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어둠과 죄를 동일시하고 죄를 검은색으로 만들어 빛과 어둠에 대한 심상을 바꿔놓았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베네딕트회를 비롯한 많은 수도회의 수도복이 검은색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기독교의 검은색은 원래 검소함과 속죄의 의미로 채택됐지만 머지않아 매섭고 가혹한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 됐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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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선 검은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melas’에서 비롯된 우울함(melancholy)이 수많은 작품에 투영됐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밀턴의 시 ‘우울한 사람’의 우울한 시인, ‘실락원’의 사탄은 영국 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추구하던 우울증, 시적 우울의 새로운 맥락으로 부상했고 이는 18세기를 거쳐 맞이할 낭만주의 시대의 바탕이 됐다.
화려한 로코코양식이 지배한 18세기에 다소 주춤하던 검은색은 19세기 전성기를 거쳐 20세기와 21세기에도 패션을 지배하고 있다. 1926년 코코 샤넬은 긴팔 소매에 치마는 무릎까지만 내려오는 ‘리틀블랙드레스’를 발표했다. 종아리는 드러내면서도 팔은 모두 감싸는 디자인으로 샤넬은 2세기 동안 지속되던 트렌드를 완전히 뒤집었다. ‘검은 시대’의 부활이었다.
저자는 “인류가 지금까지 봐 온 것보다 훨씬 많은 색깔이 넘쳐나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검은색”이라며 패션과 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검은색의 유행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500쪽이 넘는 적잖은 분량이지만 106점의 풍부한 그림과 풍부한 이야기들이 지적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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