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문재인] 노무현의 동지이자 비서…10년 만에 '1인자' 돼 청와대 귀환

입력 2017-05-10 01:20  

공부 잘하는 '문제아'
의리 지키려 싸움 벌이다 정학
대학 땐 유신반대 시위로 제적

판사 꿈 접고 인권 변호사로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 좌절
부산서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노무현이 이끈 정치인의 길
청와대 수석·비서실장 지낸 친노 맏형
노무현 서거 후 정치에 본격 뛰어들어

'친문 패권'공세 뚫고 청와대 입성
18대 대선 패배 후 권력의지 다져
당내 경선~본선 대세론으로 돌파



[ 은정진 기자 ]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중이던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고향을 떠나 월남해 경남 거제 피란민수용소에서 정착했다.

부산 영도 판잣집에서 살던 시절 부친의 장사 실패 후 강냉이(옥수수)죽 급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모친의 연탄 배달을 도우며 생계를 꾸렸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2011년 펴낸 자서전《운명》에서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라고 썼다.

경남중·고교 시절에는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시험 답안지를 보여주고, 폭력 교사에게 반항해 해당 과목을 공부하지 않기도 했다.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싸움판에 뛰어들어 네 번이나 정학당했고, 술과 담배도 한 ‘문제아(경남고 시절 별명)’였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보단 유신 반대 시위를 이끄는 데 앞장섰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당한 다음날 대규모 유신 독재 화형식을 주도해 서대문구치소에 4개월 동안 수감됐다. 장남에게 실망한 부친은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구속돼 대학교에서 제적되고 강제 징집당했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돼 31개월의 군 생활을 마쳤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입대였지만 그의 특전사 군대 경력은 안보관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방패막이가 됐다.

제대 후 시위 및 구속 전력으로 복학의 길은 막혀 있었고 취업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문 대통령은 사법고시 공부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아들로서의 결심”이었다고 했다. 선친의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입했다. 누우면 잠이 올까봐 방에 물을 뿌리며 공부에 전념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학내 시위와 공부를 병행하던 문 대통령은 1980년 ‘서울의 봄’ 시위에 나섰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결국 경찰서 유치장에서 2차 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시절에 7년 연애한 같은 대학 성악과 2년 후배인 김정숙 여사(63)와 결혼했다. 대학 축제에서 만난 김 여사는 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감옥, 군대, 대흥사 등을 찾아 다녔다. 김 여사는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 같아서 재인씨와 결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로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박병대 대법관 등이 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했다. 결국 1982년 부산으로 내려와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운명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노 전 대통령과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시국사건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2002년 당시 노무현 대선후보의 부산선거대책본부장직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노 전 대통령 당선 후 문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비서실장을 맡으며 대표적인 ‘친노(친노무현)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엔 대리인단 간사 변호인을 맡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발음이 다소 부정확해진 것도 이때 격무와 스트레스로 치아 10개가 빠졌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국회의원 선거 출마 등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린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단법인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그 후 2011년 자서전 《운명》을 출간하며 현실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책에서 “당신(노무현)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쓰며 정치인 문재인으로 홀로서기를 다짐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문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있었다.

2012년 12월 치러진 제18대 대선에서 역대 야권 후보 최다 득표인 1469만표(득표율 48%)를 얻었지만 진영 대결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51.6%를 얻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패인 중 하나로 ‘권력 의지’ 부족이 꼽힐 만큼 당시엔 본인의 의지보다 운명에 이끌려 출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후 차분히 대권 준비를 이어 온 문 대통령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출마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당선됐다. 그가 10개월간 당 대표직을 맡는 동안 당은 재·보선 패배,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국민의당으로 분열 등을 겪으며 당내외에선 그에 대한 사퇴 요구가 빗발쳤다. ‘친문(親文·친문재인) 패권주의’에 대한 당내 비주류 진영의 비판도 거셌다. 공세를 꿋꿋이 버텨낸 문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종인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결국 당초 100석도 힘들 것이라던 지난해 4·13 총선에서 민주당은 총 123석의 제1당 자리를 꿰차면서 위기론을 대세론으로 바꿔놓았다. 총선을 앞두고 인재 영입과 10만 온라인당원을 모으며 당내 기반을 다지면서 권력 의지를 확고히 해왔다는 평가다.

이후 네 차례 당 순회 경선에서 ‘대세론’을 지속한 문 대통령은 지난달 3일 총 5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대학 입학과 사법시험 모두 재수로 합격하며 자신을 재수에 강하다고 소개하며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 문재인. 그는 적폐 청산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하며 정치 입문 6년 만에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갈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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