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마오이즘

입력 2017-05-10 18:17  

[ 오형규 기자 ] 13억 중국인에게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부이자 은인 같은 존재다. 파란만장한 대장정과 항일투쟁, 국공(國共)내전 끝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붉은 대륙의 아버지’다. 말년에 역사에 결정적 흠집을 남겼음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마오는 청나라가 급속히 기울던 1893년 후난성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소련 볼셰비키혁명을 목도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해 1920년 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가 이끈 홍군이 1934년 열 달간 싸우면서 도보로 18개 산맥과 24개 강을 건넌 1만5000여㎞의 대장정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기나긴 혁명투쟁 속에 마오의 사상, 즉 마오이즘(Maoism)이 형성됐다. 전근대적 농업사회였던 중국의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형한 것이다. 여기엔 게릴라전, 대중조직, 토지개혁, 통일전선, 사상개조, 실천론, 모순론, 영구혁명론 등이 총망라됐다. 40여 년간의 혁명과 권력투쟁으로 다듬어진 마오이즘은 20세기 중반 세계 공산혁명가들을 매료시켰다. 일본 적군파, 필리핀 공산반군(NPA),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미국 블랙팬더당 등이 마오이즘의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설계자 의도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설계주의가 성공한 역사는 없다. 마오의 말년에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대혁명(1966~1976)은 치명적 오점으로 남았다. 단숨에 산업화, 농업집단화를 밀어붙이려던 대약진운동은 4500만 명이 굶어죽거나 살해되는 참극을 초래했다. 전쟁도 안 했는데 2차 세계대전과 맞먹는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인민을 ‘사회주의 인간’으로 만들려던 문화대혁명은 중국을 수십 년 후퇴시켰다. 안경 쓴 사람은 모두 주자파로 몰아 숙청할 정도였으니 지식이 남아날 리 없었다. 마오 사후 중국 공산당은 1981년 문화대혁명을 ‘극좌적 오류’로 규정했지만 마오이즘 전체를 격하하진 못했다. 마오를 부정하면 곧 자신들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 마크롱이 ‘마오주의자(Maoist)’를 자처해 중국이 환영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그는 대선기간 중 마오의 어록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극찬했다. 마오의 능력을 강조한 것이지만 정작 마오의 과오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마오는 “인민의 절반을 죽게 내버려둬 나머지 절반이 그들 몫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낫다”(디쾨터, 《마오의 대기근》)는 인식을 가진 낯 두껍고 속 시커먼 ‘후흑(厚黑)’이었다. 그런 마오를 존경한다는 정치인이 국내에도 없지 않지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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