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도 구걸 할 땐 바코드 내밀어
한국은행도 동전 없는 사회 추진
동전 제조 비용 줄고, 투명성 강화
노인 등 금융소외자 불편 우려도
[ 정채희 기자 ]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신 눈앞에 한 걸인이 나타난다. 걸인은 당신에게 QR코드(2차원 바코드)가 그려진 목걸이를 내민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고 모바일로 송금해 달라는 얘기다.’
우스갯소리거나 미래 사회 얘기가 아니다. 중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QR코드가 생활화됐다. 걸인의 사례는 단적인 예일 뿐 노점상에서 파는 과일부터 잡화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QR코드로 읽고 결제할 수 있다. 위조지폐 논란이 많은 중국에서는 국가가 아니라 상점, 즉 개인들이 현금 대신 전자결제를 권장하고 있다.
스웨덴의 사례는 더 극적이다. 정부 차원에서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스웨덴에서는 2013년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강도가 들었지만 현금이 없어 빈손으로 나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비현금 지급수단 이용률 86.7%
국내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기술 발전에 따라 현금보다 신용카드, 직불카드, 모바일 결제 서비스 사용이 늘면서 비현금 지급수단이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에서 이용 비율이 가장 높은 지급수단은 신용카드다. 현금 이용 비율보다 네 배 가까이 높다. 지난해 현금 이용률이 13.6%인 데 비해 신용카드(54.8%)와 체크·직불카드(16.2%) 이용률은 71.0%였다. 여기에 계좌이체(15.2%)와 선불카드(0.3%) 및 전자화폐(0.2%)까지 더하면 비현금 지급수단 이용률은 86.7%까지 늘어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비현금 이용 비율은 높다. 마스터카드가 2013년 33개국 개인 소비자 지출 행태 조사를 통해 각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70%로 33개국 중 10위였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월 핀테크(금융기술)로 촉발된 지급결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까지 추진할 12개 중점 과제를 이르는 ‘지급결제 비전 2020’을 선포했다. ‘동전 없는 사회’는 이 12개 중점 과제의 일환이다. 거스름돈 등 소액을 카드에 충전하거나 계좌에 입금해 줌으로써 동전 사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지난 4월20일부터 국내 주요 편의점 대형마트 백화점 등 유통업체가 시범 사업자로 선정돼 관련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한은은 이를 통해 동전 사용과 휴대에 따른 불편을 줄이고 유통과 관리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 투명성과 안전성 우수
전문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동전을 넘어 지폐까지, 이른바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800년대 중반 영국에서 최초의 현대적 지폐를 도입한 뒤 지폐 없는 경제 성장을 생각할 수 없었듯이 앞으로는 지폐 있는 경제 성장을 점점 더 생각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간(P2P)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뱅킹, 블록체인 등 핀테크산업 성장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가 투명성 효율성 안전성 간편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금 없는 경제로 이행하면 세율 인상 없이도 약 20조~64조원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만큼의 세율 인하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훈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거래 투명성이 증대되면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정부 세입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부작용도 있다. 노인 등 비교적 현금 사용에 익숙한 이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고 개인 사생활을 침해해 금융실명제 초기처럼 거래 자체가 움츠러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동전이 없어지면서 물건 가격이 1000원 단위로 책정돼 소비자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한은 금융결제국 관계자는 “현금 이용이 시장에서 줄고 있는 것에 대응해 현금 거래의 편의성을 제고하고 상황에 맞는 지급결제 정책을 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인위적으로 현금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채희 한경비즈니스 기자 poof34@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