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강원도를 다녀오면서 배부르게 녹음산들을 보고 왔다. 다른 표현은 생각나지 않았고 참 오랜만에 배부르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산들은 숨 가쁜 여름 녹음의 짙푸른 향내를 뿜으며 거기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린 날 헤어져 청년이 돼 만난 아들을 보듯 “그래 장하구나, 그동안 황사며 미세먼지며 무슨 무슨 이유가 많았건만 그래 이렇게 커 주었구나” 싶었다. 뜨겁게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다. 무엇에 그렇게 배고팠을까. 젊은 날에는 자기 자신을 들고 절절 끓고 살았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타인에 대한 고민보다 늘 자기 하나를 둘러업고 절절매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여름 녹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감동했을까.
뭐 그렇게 뒤틀린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늘 목마르고 애틋해서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 늘 부족한 마음들이 확 트이는 느낌이어서, 나는 소리를 질러 대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 탄산음료 광고에 “네 갈증에 복종하라”는 문구는 절창(絶唱)이었다. 마셔라, 마셔라. 그 광고는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 갈증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기”를 쓴 시인도 있지 않았는가. 어디쯤에서 인간은 평화롭고, 어디쯤에서 인간은 배부르고 안락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철학자마다 모두 했던 소리다.
정신의학과에서는 ‘정서적 허기’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생명의 그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이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언제까지 허기질 것인가? 내가 숨을 멎는 순간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 날부터 내 지병은 ‘감상’이었다. 늙으니 슬픔도 따라 늙었다. 참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가끔 부는 것이다. 심장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앞에서는 영혼이 꼬꾸라질 듯한 절망감을 맛보기도 한다. 풀지 못하는 감정의 미세먼지가 내 정신에 쌓여가면서 나는 앓았던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미세먼지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의 각성과 위로는 자연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여름 녹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분명 생을 들어 올리는 힘을 얻어 왔다고 생각한다. 유효기간이 짧지만 어디라도 자연은 숨 쉬고 성장하고 있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나는 내가 절망할 때 먼저 간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인생에서는 떠밀렸지만 자신의 일에서는 떠밀어 가는 생의 역동성은 누구나 배울 만한 것 아닌가. 고흐가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릴케가 그랬다.
아니 모든 예술가는 생에 밀린 만큼 일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생을 들어 올리는 정신의 힘이 아니었겠는가. 예술이 그러했을 것이다. 바다에만 파도가 있겠는가. 내가 바라보는 강원도 산의 녹음 천지에도 파도가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짙푸르면서 검푸르게 깊어 가는 녹음은 무엇인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비어가는 것은 공터가 아니다. 외로워도 하지 마라. 채울 생각은 더욱 하지 마라. 허기지고 갈증이 생기면 책 한줄 더 읽고 글이 써지지 않으면 오래 빈공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 자체가 노력이며 가고 있는 동작이므로 갈증은 사라질지 모른다”라고.
녹음 속에서 뜨듯한 향기가 퍼져왔다. 어머니 대신 녹음이 나에게 다독거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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