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국은행의 탄생

입력 2017-06-11 17:50  

[ 고두현 기자 ]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는 조선 시대 인조가 어릴 때 살던 송현궁(松峴宮) 터다. 상평통보를 처음 발행하며 화폐경제 시대를 연 인조의 옛 집터에 중앙은행이 들어섰다는 게 흥미롭다. 구한말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이 치과병원을 운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경성치과전문학교와 서울대 치과대학으로 이어지다 1988년 한국은행 본관으로 바뀌었다.

1987년까지 본관으로 쓰던 르네상스 건축물(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인조의 고모부 집인 달성위궁(達成慰宮) 자리다. 스크랜턴은 이곳을 사들여 달성교회를 세웠다. 이승만·최남선·주시경 등이 야학을 가르치던 그 교회다. 그러다 일본 제일은행이 이를 매입해 은행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때만 해도 대한제국의 국고금을 일본의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이 관리했다. 당시 은행장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선통감에게 중앙은행 설립을 제안하며 건물부터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토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앙은행을 별도로 세우기로 하고 이름을 ‘한국은행’(현재의 한국은행과 달라 구(舊)한국은행이라 부름)이라 붙였다. 결국 제일은행은 공사 중인 건물을 1909년 구(舊)한국은행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그해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이 탄생했다. 이는 한일강제병합 이듬해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실상부한 한국은행은 6·25 발발 13일 전인 1950년 6월12일 출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를 빌미로 경제정책까지 통제하려던 미국에 맞서 한국은행법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초대 총재는 조선은행의 마지막 총재인 구용서에게 맡겼다. 금통위원, 대리위원들도 조선은행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훗날 조흥은행장이 된 김교철 대리위원은 아들 김정렴(전 재무부 장관)과 함께 2대가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에 근무한 진기록을 남겼다.

한국은행은 6·25 때 전쟁비용을 조달하고 전후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등 국가 재건의 중추 역할을 했다. 고도 성장 과정에서 급증한 통화량을 조절하며 유연한 금리정책으로 환율을 안정시키는 기능도 했다. 1997년까지는 핵심 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이 맡는 등 정부 간섭이 컸다. 1995년 한은법 개정 이후 중앙은행으로서의 독립성을 확보했으나 아직도 남은 과제는 많다.

오늘은 한은 설립 67주년이다. 새 정부의 첫 경제사령탑인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곧 이주열 한은 총재와 만나 정책 공조 방안을 논의할 모양이다.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미시·거시경제를 위한 두 기관의 균형 잡힌 하모니를 기대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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