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검찰' 공정위의 새 항로는
4대 재벌만 겨냥한 법 개정 추진 안할 것
쟁점 이슈는 국회의원 참여하는 TF서 논의
경쟁 촉진보다 경제사회적 약자 보호 우선
퇴직 관료나 로펌 변호사와 접촉 자제하라
[ 황정수 기자 ]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취임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개혁’에 대해 완급 조절 의사를 내비쳤다. “검찰개혁처럼 몰아치듯 할 수 없다”며 개별 정책의 시급성과 현실성을 따져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시대적 소명과 관련해선 ‘경쟁 촉진’보단 ‘경제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가 우선순위라고 강조했다.
로펌과의 유착 의혹 등이 불거지며 여론의 질타를 받은 공정위 업무 기강과 관련해선 “공정위 퇴직관료(OB)나 로펌 변호사 등 이해관계자와 접촉하는 일은 자제하라”며 경고장을 꺼내 들었다.
◆“재벌개혁, 정교한 실태조사 필요”
김 위원장은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취임식 후 기자들과 만나 “재벌개혁은 검찰개혁과 달리 몰아치듯 할 수 없다”며 “합리적 방안을 마련해 서두르지 않고 일관되면서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제 (임명장 수여식 때)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런 말씀을 드렸다”고도 했다. 이어 “기업 관련 일은 이해관계자가 많고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정교한 실태조사가 우선”이라며 “금융위원회 등과 협조체제를 가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정위가 직접 나서 ‘4대 재벌’만 겨냥한 법 개정안을 발의하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김 위원장은 “4대 그룹에 집중하겠다고 한 적이 있지만 4대 그룹을 찍어서 몰아치듯이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4대 재벌 규제를 위한 법 개정도 추진할 생각이 없다”며 “국회에 계류돼 있는 법 개정안 틀 안에서 합리적 대안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규모별 규제 차등화도 시사했다. 김 위원장은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그룹과 10조원 이상 그룹을 동일한 잣대로 접근하는 건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4대 그룹, 10대 그룹 관련 구체적인 정책 방향 등을 조만간 공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 위원장은 “워낙 쟁점이 뜨거워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이슈라면 전문가와 여야 국회의원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먼저 구성할 필요가 있다”며 “이후 의견차를 좁힌 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논의하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 강화, 기업집단국 신설, 과징금 상향 등 공정위가 법 개정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정책은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지주회사 행위 규정 강화, 기존 순환출자 규제 등 공정거래법 개정이 필요한 것은 각계 의견을 충분히 듣고 검토하겠다는 뜻이란 분석이 나온다.
◆“업무기밀 외부 유출 용납 못해”
공정위의 최우선 과제로는 ‘경제적 약자 보호’를 꼽았다. 그동안 공정위 관료들은 ‘경쟁법의 목적은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는 법언을 중시하며 ‘부당한 갑을관계 척결’보다 ‘경쟁 촉진’을 본연의 업무로 여겼는데, 앞으론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공정위에 대한 요구를 거칠게 요약하면 경쟁자, 특히 경제사회적 약자를 보호해달라는 것”이라며 “공정위는 을(乙)의 호소를 듣고 피해를 구제하며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책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공정위 간부와 직원들에게 경고 메시지도 던졌다. 김 위원장은 “사회적 소통이 중요하지만 조직의 업무 기밀이 비공식적인 통로로 외부에 유출되는 수준까지 허용할 순 없다”며 “업무시간 이외에는 공정위 OB들이나 로펌의 변호사 등 이해관계자와 접촉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전속고발권 폐지’ 공약의 대안으로 공정위가 추진 중인 ‘고발요청 기관 확대’, ‘사인의 금지청구권 도입’과 관련해선 “국회와의 충실한 협의와 협치 과정이 없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운 과제”라며 “국회와 진정성 있게 논의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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