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잡스는 적자투성이 픽사를 그에게 부탁했다

입력 2017-06-22 19:28  

레비 씨, 픽사에 뛰어들다
로렌스 레비 지음 / 강유리 옮김 / 클레마지크 / 368쪽 / 1만5000원



[ 송태형 기자 ] 2005년 어느 가을날, 픽사 이사회 멤버 로렌스 레비는 미국 실리콘밸리 팰러앨토에 있는 집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스티브, 산책 갈래요?” “물론이죠 로렌스, 이쪽으로 오세요.”

레비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잡스의 집으로 갔다. 레비는 잡스와 함께 산책하며 근황을 주고받다가 용건을 꺼냈다. “픽사가 갈림길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가가 너무 높아졌어요. 픽사가 높은 평가액을 발판으로 디즈니처럼 사업을 다각화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니면 디즈니에 팔아야겠죠.” 잡스가 레비의 말을 대신 맺어줬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인 2006년 1월25일, 디즈니는 픽사를 76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픽사 주식의 과반을 소유하고 있던 잡스의 주식 가치는 수십억달러에 달했다.

《레비 씨, 픽사에 뛰어들다》(원제 To pixar and beyond)는 레비가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전략담당 임원으로 잡스, 애드 캣멀, 존 래시터 등 비범한 동료와 함께 픽사의 놀라운 번영을 일궈낸 12년간의 여정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레비와 잡스의 ‘산책 대화’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 픽사의 전략적 결정과 사업적 행동이 어떻게 회사의 번영으로 이어졌는지를 내부자 시선으로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실리콘밸리의 유망 기술기업 CFO를 맡고 있던 레비는 1994년 말 잡스의 요청으로 픽사에 합류한다. 당시만 해도 픽사는 이렇다 할 수익 모델이 없는 적자투성이 회사였다. 천재적인 예술성과 창의성은 넘치는 곳이었지만 현실적 기반이 부족했다. 공동 설립자인 캣멀이 매달 소유주인 잡스에게서 받아오는 개인 수표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잡스는 이미 픽사에 약 5000만달러를 들인 상태였다.

잡스가 레비에게 부여한 ‘특명’은 한마디로 스토리텔링,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대한 픽사의 특별한 재능에 기반한 회사의 성장 동력을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회사를 상장시키는 것이었다. 레비는 잡스, 캣멀 등 경영진과 래시터를 주축으로 한 크리에이티브팀을 끊임없이 오가며 수익성 없는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하고, 회사를 디지털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를 전문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픽사의 행보는 눈부시다. 이 회사는 1995년 11월 개봉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 ‘토이스토리’를 시작으로 ‘벅스 라이프’ ‘니모를 찾아서’ 등을 줄줄이 히트시키며 ‘흥행 불패 신화’를 써내려갔다. 시장의 관심 속에 진행된 기업공개(IPO)는 대성공을 거뒀다. 레비는 “픽사가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은 특유의 창조적 정신과 기업 문화를 유지하면서 성장 동력을 부여할 전략·질서·관리 체제를 효과적으로 구축한 것”이라고 말한다.

픽사 경영진은 ‘토이스토리’ 이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제작할 영화에 디즈니처럼 임원진이 창작 과정 단계마다 관여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잡스는 “진정으로 독창적인 영화, 누구도 보지고 듣지도 못한 스토리가 우리의 목표”라며 “디즈니와는 목표가 다르다”는 의견을 냈다.

최종 결론은 창작팀을 믿는 것이었다. 저자는 “창작 과정의 실수로 예산과 일정이 선로를 일탈할 때의 부정적 측면보다 창작의 자유를 보장할 때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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