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의 데스크 시각] 초대형 투자은행 키울 의지 있나

입력 2017-06-26 17:22   수정 2017-06-27 07:41

이건호 증권부장 leekh@hankyung.com


미래에셋대우와 NH투자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KB증권의 공통점은 자기자본이 4조원 이상이라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우자는 취지로 도입하기로 한 초대형 투자은행(IB) 자격을 갖춘 곳들이다. 정부는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증권사에 발행어음을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8조원을 넘기면 고객의 돈을 기업에 빌려주는 종합투자계좌 업무도 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늦어지는 초대형 IB 출범

올 상반기 안에 인가를 받아 초대형 IB 업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증권사들의 기대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국정농단 사태와 조기 대통령 선거, 금융위원장 인선 지연 등으로 인가 신청이 늦어지면서 9, 10월께나 인가 절차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새 금융위원장의 성향에 따라 정책 방향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루머까지 나돌고 있다.

증권사들은 답답하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금융당국의 방침에 맞춰 자본을 확충하고 조직 개편까지 한 5개 대형 증권사는 이달 말 금융위에 초대형 IB 업무 인가 신청을 할 계획이지만 언제쯤 업무를 시작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의 초대형 IB 구상은 국내 증권산업 도약과 함께 유망 중소·벤처기업 발굴을 통한 일자리 창출 방안으로 주목받았다. 초대형 IB를 준비 중인 5개 증권사의 자본금을 합치면 23조원에 달한다. 증권사들이 초대형 IB 인가를 받으면 이 돈을 활용해 중소·벤처기업에 자금을 빌려줄 수 있다. 은행 문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 자금이 흘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추가경정예산 11조원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증권사들이 초대형 IB 인가를 받아 기업신용공여(발행어음) 업무를 하려면 ‘인가(적격성 심사)’라는 진입장벽을 넘어야 한다. 금융당국은 해당 증권사는 물론 대주주가 벌금형이나 기관경고 등의 제재를 받았어도 해당 시점부터 1~5년까지 인가를 거부할 수 있다.

과도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 우려

상당수 증권사가 합병 전 법인과 관련한 징계나 어음발행과는 무관한 대주주의 결격사유 등을 이유로 인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증권업계에서 흘러나온다. 삼성증권은 대주주인 삼성생명의 자살보험금 지연 지급(기관경고)에 발목이 붙들릴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국투자증권은 대주주인 한국지주의 자회사 코너스톤이 파산한 점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미래에셋대우와 KB증권은 각각 합병 전 대우증권, 현대증권의 ‘잘못’ 탓에 불이익을 받을 처지다.

세계 최대 규모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매년 수백 개의 벤처기업에 투자한다. 이 중 상당수는 실패하지만 수십 개는 ‘대박’을 터뜨린다. 여기서 번 돈을 다른 기업에 다시 투자한다. 2000년대 들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운다며 초대형 IB 육성 방안을 내놨지만 공염불로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금융산업 구조를 선진화하기 위해 금융당국의 까다로운 인허가 과정을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 진입장벽을 완화해 경쟁을 촉진하는 대신 사후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새 정책을 꺼내 드는 것도 좋지만 작은 규제 완화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카드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다. 다음 정부에서도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육성하겠다”는 20여 년 전의 구호를 또 듣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건호 증권부장 leek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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