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의 논점과 관점] '신념윤리'에 갇힌 문재인 정부

입력 2017-07-04 19:44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꼽았다. 신념윤리는 대의(大義)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베버는 둘 다 필요하다고 봤지만 책임윤리에 더 무게를 뒀다. “모든 선의(善意)가 선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가 아니라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란 그의 말은 이를 대변한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외쳐 대는 ‘책임정치’란 말도 베버의 책임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말(顚末)을 철저히 파악해 최상의 아젠다를 설정하고, 결과도 책임지는 것이다. 더 나은 성과를 위해 때로는 비판자들의 견해를 수용하고,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여기엔 실용과 성과가 최우선 가치여서 이념이 스며들 여지가 적다. 반대로 신념윤리가 강할수록 정책은 이념화되게 마련이다. 디테일은 떨어지고 이해당사자 간 갈등은 고조된다. 경제 문제를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로 풀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려스런 경제정책의 이념화

요즘 한국 정치판에 신념윤리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정규직 제로(0),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거의 모든 경제 현안들이 마땅히 해야 할 당위(當爲)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어서다. 최저임금을 시급 1만원으로 인상하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은 추가 부담이 향후 3년간 140조원에 달하지만, 일방적으로 양보를 강요당하고 있다. “경제 문제를 정치논리로 접근하니 정부와 대화해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기업인들의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시민·노동단체의 입김이 강한 문재인 정부가 친(親)노동 성향인데다 결과보다는 아젠다에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4대강 사업 재감사, 탈(脫)원전 등 환경 정책도 이념 지향적이란 지적이다. 4대강 사업은 좌우 진영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사안이다. 하지만 가뭄과 홍수 피해를 크게 줄인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탈원전 정책은 안전과 환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에너지 수급과 사회적 비용에는 입을 닫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탈원전 시나리오에 소요되는 비용 추계’에 따르면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을 2035년까지 현재 수준보다 17%가량 늘리려면 163조~206조원의 비용이 더 든다. 탈원전 로드맵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30% 진행된 신고리원전 5·6호기의 영구 폐쇄 여부가 시민배심원단에 의해 결정될 처지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주관적 믿음을 앞세우는 ‘신념윤리’에 집착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국익 위해 신념 바꾼 '진짜 용기'

문재인 정부가 계승했다는 노무현 정부는 진보 지식인의 주관적 신념을 넘어 책임윤리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반미(反美)로 뭉쳐 있던 핵심 지지층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을 이뤄냈다. 그는 “개인 노무현이라면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지지층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 백년대계를 우선시한 지도자의 고뇌가 엿보인 대목이다.

소신과 신념을 바꾸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을 바꾸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베버의 지적처럼 결과가 의도보다 훨씬 중요한 게 현실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의 차이도 바로 여기서 갈라진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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