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이 기자 ]
잘나가던 47세 은행원,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은행원 이형철 씨는 47세에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병원에서 주판알 다섯 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라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협에서 전무까지 하면서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 그였다. 우울증까지 겹쳤다.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게 창피했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활을 재촉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걷는 것조차 불편한 몸을 땅 가까이 낮췄다. 숲에 길을 내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 엎드려 돌을 옮겼다. 몇 번을 비탈길에서 구르고 가시덤불에 다쳤다. 3년이 흐르니 제법 그럴듯한 길이 만들어졌다. 도면도 없이 맨손으로 닦은 650m의 숲길.
불편한 몸 창피해 무작정 숲으로…3년간 숲길 만들어
그 숲이 지금 제주의 대표적인 체험 관광지로 유명한 ‘환상숲-곶자왈(제주 원시림) 공원’이다. 작년 한 해 방문한 사람만 10만여 명. 아이돌그룹 악동뮤지션과 f(x)의 뮤직비디오, 드라마 ‘미씽나인’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길을 내고 숲을 안내하는 과정에서 이씨의 몸도 완쾌했다. 환상숲 곶자왈은 이씨가 23년 전 사둔 땅이다. 그의 부인 문은자 씨는 당시 곶자왈을 사온 남편을 보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고 한다. “남편이 쓸모도 없는 땅을 시세의 30배가 넘는 가격으로 사왔어요. 빚까지 내면서요.”
이씨는 전남 해남 출신이다. 집이 가난해 제주에라도 가면 일이 있을까 싶어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이씨는 육지와 다른 제주의 숲과 나무가 신기했다. “남들은 곶자왈을 보고 어지럽고 쓸모없는 땅이라고 했지만 내 눈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어디가 나뭇가지인지 혹은 뿌리인지, 덩굴이 나무인지, 나무가 덩굴인지, 흙인지, 아니면 돌인지, 작은 동굴인지…. 환상숲은 곶자왈이다. 숲이라는 의미의 제주어 ‘곶’, 암석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단어다. 이씨는 3년간 길을 내면서 곶자왈의 생명력에 감동했다. “약해진 내게 나무들이 말해줬습니다. 자기는 돌을 뚫고 자랐다고. 허리가 잘렸는데도 다시 자랐다고. 악착같이 일어났다고.”
숲길 생기자 관광객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
숲에 길이 생기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건강을 회복하고 근처에서 농사를 짓던 이씨는 그게 반가웠다. 숲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농촌진흥청에서 교육을 받고 2011년 농촌교육농장으로 문을 열었다. 그렇게 연 공간이 ‘환상숲-곶자왈공원’. 처음엔 하루에 달랑 한두 명만 찾았다. 남편이 숲 해설을 하고 아내는 매표를 하는 식이었다. 서울에서 농촌컨설팅 연구원으로 일하던 딸 이지영 씨를 불렀다. 딸은 한 달 휴가를 받아 제주로 내려왔다. 함께 이야기를 쌓아갔다. 아버지가 3년 동안 길을 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이 지영씨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곶자왈 스토리로 재탄생했다. 그다음엔 애써 홍보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환상숲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홍보대사가 됐다. 만화가는 만화(애니메이션 해피바이러스)를 그렸고, 작곡가는 작곡(이루마 피아노 연주회)을, 사진가는 사진(이광호 사진전)을 찍었다.
딸 지영씨 서울생활 접고 합류…관광객 소개로 결혼까지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지영씨는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왔다. 환상숲에 가면 길을 닦은 형철씨와 부인 은자씨, 딸 지영씨, 사위 노수방 씨가 준비한 숲 해설을 시간대별로 들을 수 있다. 혼자 걸으면 15분이면 끝나는 길이지만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함께 걸으면 50분이 금방이다. 딸에게도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영씨의 숲 해설을 인상 깊게 본 한 신사가 자신의 아들을 소개하겠다고 나선 것. 그렇게 닿은 인연으로 지영씨와 수방씨는 2015년 환상숲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곶자왈 지대는 제주 면적의 6.2% 정도다. 하지만 곶자왈의 60%가량이 사유지로 골프장, 관광단지 개발과 토석 채취, 재선충 등으로 상당 면적이 잘려나갔다. 환상숲은 ‘곶자왈사람들’이라는 단체와 연계해 곶자왈 식생 조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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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FARM 고은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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