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갑 기자 ]
어린 시절에는 백과사전 세 개를 통째로 외우다가도 사찰 처마 위 수북이 쌓인 먼지가 궁금해 손으로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유별난 아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교탁 옆 노란 주전자를 똑같이 그려 ‘천재 소년 화가’라는 별명도 붙었다. 13세 때부터 붓을 든 그는 올해로 44년째 막연한 설렘으로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낚고 있다. 국내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 화풍 대표 작가인 이진용 씨(56) 이야기다.
오는 3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이어지는 그의 개인전은 44년 미술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오래된 책들과 활자, 도자기, 가방 등 골동품을 마치 수행하듯 화면에 올려놓으며 날마다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작가의 끈기와 오기가 놀랍다. 그래서 전시회 주제도 반복적 행위와 고도의 집중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컨티뉴엄(Continuum)’으로 붙였다.
부산 동아대 조소과를 졸업한 이씨는 그동안 아크릴, 유화, 나무 조각, 돌 조각, 에폭시, 콜라주 등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해 왔다. 관심이 가는 소재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걸 표현하는 데 적합한 재료와 기법도 연구했다. 1980년대 말 냉소적이고 중성적 화면을 추구하는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을 흡수한 그는 한국적 극사실주의 화법의 단색화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듣는다.
4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는 마치 고분을 발굴하듯 고행을 통해 완성한 ‘책(Hardbacks)’과 ‘활자(Type)’시리즈 220여 점을 걸었다. 사진이나 사물을 놓고 그대로 그리는 극사실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실은 오롯이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단색 계열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극사실주의적 기법을 활용해 순수한 단색만으로 꾸민 그의 작품들은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고유의 미의식을 담고 있다.
이씨의 ‘책’시리즈는 물감으로 선을 긋고, 지우고, 다시 긋고, 닦아내기를 수천 번 반복해 그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승화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어떤 형상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니고 대상의 본질이나 시간의 축적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천 개 활자를 부조처럼 정교하게 형상화한 작업 역시 무언가 알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존재감이 마치 별빛처럼 흘러넘친다. 눈이 아니라 오감으로 봐야 하는 작품이란 얘기다. 결국 작품의 메시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으로 번져나간다. 그의 활자 그림 앞에선 그저 망연해지는 까닭이다.
스스로 ‘시간을 그리는 작가’라고 칭한 이씨는 사실 널리 알려진 ‘수집광’이다. 그동안 수집한 책, 가방, 악기, 도자기, 시계, 카메라, 타자기, 보이차, 침향 등 물건만도 무려 40만~50만 점에 달한다. 이쯤 되면 그림과 골동품, 의상, 소품 등을 닥치는 대로 모으는 수집벽을 지녔던 인상주의 대가 렘브란트 판 레인에 비견할 만하다.
그는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운명”이라고 했다. “수집품은 시간이 묻어 있는 내 작업의 교과서 같은 것이죠. 자연과 삶의 본질을 깨우쳐 줍니다.” 오랜 세월을 지내 온 그의 수집품들은 캔버스에 고스란히 올려져 선조의 장인정신을 뿜어낸다. (02)720-152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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