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끝 - 주변국으로 퍼지는 '스타트업 혁명'
[ 김태호/이동훈 기자 ]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중심가에 자리 잡은 ‘유닛시티’. 큼지막한 건물 3개 동으로 구성된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1번지’로 불린다. 월 150달러에 사무실 이용은 물론 해외시장 진출, 투자 유치 컨설팅까지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덕분에 단숨에 300명이 넘는 예비 창업자를 끌어모았다.
옛 소련의 오토바이 공장이었던 이곳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스타트업 허브’로 탈바꿈시킨 건 2015년. 비슷한 시기에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에스토니아의 성공 모델을 벤치마킹해 ‘창업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발트 3국으로 확산되는 창업 열풍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열풍’은 이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주변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올초 유럽 최초로 ‘스타트업 활성화법’을 시행한 라트비아가 대표적인 예다. 스타트업 종사자에 한해 월소득 4050유로(약 530만원)까지는 소득세를 최대 월 259유로(약 34만원)만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학 분야 해외 인재가 라트비아 스타트업에 취업하면 소득세를 아예 면제해준다. 지난 5월에는 라트비아에서 창업하는 외국인이 더욱 간편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스타트업 비자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에스토니아의 ‘스타트업 비자’ 제도를 그대로 들여온 셈이다.
알비스 아세라덴스 라트비아 경제부 장관은 “스타트업 육성은 라트비아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국가 과제 중 하나”라며 “에스토니아를 따라잡기 위해 정치인을 비롯한 전 국민이 똘똘 뭉쳤다”고 말했다.
라트비아 정부의 확고한 스타트업 육성 정책에 민간 기업인들도 화답했다. 창업 지원에서부터 투자 유치 지원에 이르기까지 민간 중심으로 움직이는 ‘에스토니아식 스타트업 생태계’를 라트비아에서도 구현키로 한 것. 중심축은 지난해 설립된 라트비아 스타트업협회인 ‘스타트 인 라트비아’가 맡고 있다. 협회 설립을 주도한 다니엘 파블루츠 전 라트비아 경제부 장관은 “라트비아는 20세기 초 자동차 비행기 카메라 제조기술을 보유한 기술 강국”이라며 “에스토니아와 같은 창업 환경만 만들어주면 숨어 있던 잠재력이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업 인프라가 속속 갖춰지면서 스타트업 생태계도 한층 풍성해지고 있다. 현재 라트비아 스타트업협회에 등록된 스타트업 수는 259개. 이들 기업은 지난해 투자금 4413만유로(약 567억원)를 유치했다. 2010년 투자유치금이 40만유로였던 점을 감안하면 6년여 만에 110배로 늘어난 셈이다. 파블루츠 전 장관은 “지난해 라트비아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 중 77%는 해외에서 유입된 자금”이라며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겸비한 라트비아 스타트업에 주목하는 해외 벤처투자자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열풍은 리투아니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리투아니아에 있는 20여 개 스타트업 지원 기관은 협회에 등록된 254개 업체를 △아이템 발굴 △팀 구축 △창업 △제품·서비스 출시 △투자 유치 등 5단계로 구분한 뒤 단계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이디어 개발부터 투자 유치까지 6단계로 지원하는 에스토니아 창업 생태계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제2의 탈린으로 성장하는 키예프
우크라이나 경제개발부 청사에 있는 국제회의실의 한쪽 벽면은 그동안 이 나라 경제에 기여한 인물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노신사들의 얼굴이 담긴 액자 사이로 걸린 2명의 청년 사업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주인공은 세계 최대 온라인 결제서비스 업체 페이팔을 공동 창업한 맥스 레브친과 세계 1위 모바일 메신저 앱(응용프로그램)인 와츠앱(WhatsApp)의 창업자 얀 쿰. 경제개발부 공무원에게 이들의 사진을 건 이유를 물었더니 “우크라이나가 배출한 스타 기업인이자 국가 경제에도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란 설명이 돌아왔다.
2014년 페이스북에 팔릴 당시 와츠앱의 매각금액은 190억달러(약 21조원)로, 당시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950억달러)의 20% 규모였다. 스카이프 매각으로 창업 열풍이 불기 시작한 에스토니아처럼 와츠앱 매각도 우크라이나 청년들을 자극했다는 설명이다.
스테판 쿠비프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경제개발부 장관은 “와츠앱과 페이팔의 성공에 힘입어 매년 2만 개가 넘는 정보기술(IT) 관련 일자리가 생기고 있다”며 “뛰어난 IT 인력을 창업으로 유도하기 위한 인프라를 차근차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닛시티는 이런 인프라 구축의 첫걸음이었다. 페이팔과 같은 ‘데카콘’(기업가치 10조원 이상 스타트업) 기업이 미국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키예프에서 태어나기 위해선 스타트업 생태계부터 손봐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동유럽 인프라 개발에 투자하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의 박수민 이사는 “키예프는 향후 탈린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스타트업 혁명이 일어날 만한 장소”라며 “4400만 인구와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잠재력은 에스토니아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다.
■ 오바마의 극찬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4년 9월 에스토니아 탈린을 방문했을 때 열린 기자회견에서 “에스토니아는 21세기에 시민이 어떻게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스마트 기기 등을 통해 언제든 국민과 소통하는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정부 시스템에 대한 찬사였다.
키예프·리가(라트비아)=김태호/이동훈 기자 highk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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