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은 경남 산청의 한 농촌. 모내기가 한창이다. 20대 청년 셋이 나이 지긋한 농부들 사이에 껴있다. 이들에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구박. “그것도 못 하냐.” 청년들은 한숨을 쉰다. 그러다 잠시 쉬는 시간. “너는 뭐하고 살거냐.” “모르겠다.” “취업 안 되잖아.” “정말 농사를 지어야하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청년들. 그 중 하나가 불쑥 말을 던진다. “야, 우리 농업 세계일주나 갈까.”
◆땅에서 꿈을 캔다
1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밍 보이즈(Farming Boys)’의 주인공들이다. 2년 동안 농업을 주제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엉뚱해보이지만 그냥 한다. 그걸 직접 찍은 게 영화다. 2013년 9월부터 2015년 9월까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네팔,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유명 관광지는 거의 안 갔다. 대신 커피농장, 채소 연구소, 농군학교를 갔다. 12개국 35개 농장을 떠돌았으니 오래도, 많이도 갔다.
출발할 때 가져간 돈은 달랑 30만원. 그걸 들고 일단 호주로 향했다. 1년 간 농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계일주할 자금을 모았다. 이후론 전세계 온갖 형태의 농장은 다 다녔다. 우핑(wwoofing: 농장에서 일하면서 농장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활동)을 하면서다. 세 청년은 우핑을 통해 라오스, 인도, 네팔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까지 여러 국가의 농업 현장을 본다.
이들이 만난 이탈리아의 청년들은 비장했다. 국가의 공유지를 무단 점거해 농장을 꾸린다. 개발을 위해 농지를 기업에 파는 정부에 항거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프랑스의 젊은 농부 커플은 분위기가 다르다. 낭만적이다. 이 커플은 땅을 공짜로 빌렸다. 농사를 짓고 싶지만 여력이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땅을 장기 대여해주는 재단의 도움을 받은 것. 어떤 벨기에 농장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좀 애매하다. 소비자가 필요한 1년치 작물을 농장과 직접 계약하고, 원할 때 농장에 와서 작물을 수확해간다.
세 청년은 이런 곳을 가서 그냥 부딪힌다. 물론 찾아가서 일해도 되겠냐고 농장에 메일을 미리 보내도 봤다. 하지만 긍정적 회신이 온 곳은 80곳 중 7곳 뿐. 확인조차 안 한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또 보냈다. 솔직히 영어도 잘 안 됐다. 그래도 농장에 가서 사람들하고 얘길 해보면 이상하게 말은 통했다. “아, 뭐라시는 거야?” “이런 거 아냐?” 보면 얼추 뜻은 맞다.
무일푼 농업세계일주다 보니 하루에 수십㎞를 걷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농업이 컨셉이라니 영화도 근엄하고 진지할 것 같지만 안 그렇다. 청년들의 실수도 잦다.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농장에 간 첫날. 뭣도 모르고 샤워를 했는데 그 이후로 단수가 됐다. 그날 농장 사람들이 쓸 물을 다 써버렸다. 프랑스 사과농장에선 대형 주스 탱크를 실수로 망가뜨렸다. 농장주 눈치를 엄청 봤다.
하이라이트는 프랑스 농부 커플에게 직접 만든 노래를 불러준다고 했을 때. 기대에 가득찬 커플의 눈빛.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노래는 어느새 스리슬쩍 끊겼다. 그리고 멋쩍은 웃음. “아, 사실은 이 노래 어젯밤에 만들어서… 가사를 까먹어서요.”
◆대책없는 농업여행, 왜 시작했을까
천방지축 삼형제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이력은 심상치 않다. 권두현 씨(여행 당시 27세, 현재 30세)는 부모님이 농부다. 경남 산청에서 쌀과 딸기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두현 씨도 농사일이라면 반쯤은 전문가다. 후계농이 되기로 결심하고 원예학과로 편입해 농업 공부를 했는데, 부모님 방식과 똑같이 농사를 짓기는 싫다. 경험을 쌓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유지황 씨(당시 28세, 현재 31세)가 ‘농업 세계일주를 가자고 했다. 그 과정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이런 게 있다고 보여 주자고 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세계일주를 시작한 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농촌에서 살았고 옆에서 봐왔던 것이 농장이었는데 외국은 어떤지 궁금했어요. 사실은 혼자 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황이 형이 같이 가보자고 제안하는데 그럴듯하더라고요. 그래서 낚였죠.”
지황 씨는 프로젝트의 주동자다. 이집트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노숙자 아이들을 봤다. 마음이 아팠다. 이들에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줄 수는 없을까. 해답은 먹거리 그리고 농업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상황을 살폈다. 농촌엔 사람 손이 필요하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었다. 거기서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작은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다. 얼마 안 가 땅 주인의 통보로 텃밭을 정리해야만 했다. 농자재 배달일도 하고 유명하다는 협업 공동체도 가봤다. 그런데 미래가 잘 안 보였다. 공동체 모델 자체는 좋아보였지만 수익이 미미했다.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부딪히며 공부를 해보자고 했다. 그 과정에서 영상도 찍어보자고 했다. “저는 기획자예요. 뭘 추진하고 사람들이랑 일 벌이는 걸 좋아해요. 농업에서 미래를 찾아보고 싶었고, 그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김하석 씨(당시 27세, 현재 30세)는 지황 씨의 대학 후배다. 스스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영화 내내 직접 작곡한 노래를 우쿨렐레로 연주하는 인물. 땡볕에서 몸을 굴리며 일하는 것보단 그늘 안에서 쉬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농업은 나완 잘 안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동안 지황 씨의 농업 프로젝트에 계속 함께한 게 하석 씨였다. 농자재 배달도 같이 하고 협업농장도 둘이 갔다. 계속 접하다 보니 앞으로 농업이 중요하겠다는 느낌이 조금이나마 왔다. 농촌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니 이상하게 짠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대학을 막 졸업했는데 뭘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한 1~2년 인생 경험 쌓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취업 걱정 하시는 부모님께는 영어 배우러 간다고 했어요. 저희 셋이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세계일주로 얻고 싶었던 게 셋이 다 달랐거든요.”
◆’안간힘‘이 빛났던 순간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여행 때는 장난이 아니었다고 했다. 주제가 농업이다보니 몸부터 힘들었다. 그 극한은 이탈리아. 땅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청년들의 농장을 찾았을 때다. 두 달 동안 비가 안 왔다. 땅은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고 감자는 바싹 말랐다.
“텐트 생활을 했어요. 너무 덥고 마실 물도 거의 없고, 당연히 씻지도 못했죠. 계속 설사하고 아프고 그런데도 일을 해야하니까 힘들고. 그 때 같이 있던 이탈리아 청년 얼굴을 봤어요. 이들은 평생 이렇게 고생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거기에 제가 심적으로 동화가 된 것 같아요. 농업에, 청년에 정말 희망이 있는 게 맞나 싶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것 아닌가. 그 때는요.”(지황 씨)
세 청년이 성실하게 농장 일을 해내자 아예 착취 수준으로 일을 시킨 곳도 있었다. “저희가 농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농장은 일을 심하게 많이 주더라고요. 16시간 동안 일하라고 하고, 갑자기 청소가 필요없는 창고를 치워야한다고 하고. 인격체로 대하는 게 아니라 정말 밀린 일을 다 처리하려고 저희를 이용하는 곳들.”(하석 씨)
가장 힘든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고 했다. 세계일주의 목표가 각자 다르다보니 부딪힐 일이 적지 않았다. 농장이 다 떠나갈 듯이 오열하기도 여러 번. 한번은 해체 직전까지 갔다.
“모두가 힘들었을 때가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였던 것 같은데, 일하면서 촬영하는 일이 사실 농장 눈치가 많이 보이거든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강박도 있었고. 서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참다가 한번 크게 터졌습니다. 다시는 이 친구들을 안 본다는 생각으로 여행 중간에 한국에 들어왔죠.”
그 때 지친 셋을 다시 불러 모은 게 영화 ‘파밍 보이즈’를 연출한 장세정 감독이다. 청년 셋이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와 찍은 영상을 보고 매력을 느낀 것. 영상만 잘 구성해 편집해도 영화가 되겠다 싶었다. 제작사 콘텐츠나무가 셋의 여행을 돕기로 했다. 셋은 세계일주를 이어나갔다.
“당시 한창 금수저니, 흙수저니, 헬조선이니 이런 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들에게선 혐오나 냉소가 아니라 안간힘이 보였어요. 그 안간힘이란 게 ‘해내고 말겠어’ 이런 악에 받친 게 아니에요. 순수함과 무지함을 가지고 세상에 뛰어드는 것. 그런 용기가 보였어요.”(장 감독)
◆일하지 않으면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울고, 웃고, 싸우고, 배우면서 청년 셋은 2년 간의 세계일주를 마쳤다. 돌아온 이들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농장은 어딜까. 네덜란드 아니타 아주머니의 ‘치유농장’이다. 이곳엔 수 백 마리의 양이 산다.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고, 양을 돌보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판다. 청년들의 마지막 코스였다.
이 농장은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농장에 초대한다. 아니타 아주머니는 동물들의 스킨십, 자연과 땀 흘리는 농사일이 정서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안다. 이 농장은 2년간의 고된 여정에 지친 청년들도 따뜻하게 품었다. 마지막 밤. 하석 씨는 우쿨렐레를 들고 농장 사람들 앞에 섰다. 여행을 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꽤나 어려웠음을 고백하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두현 씨는 아니타 아주머니의 코치를 받으며 양의 자궁으로 맨손을 집어넣어 새끼양을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며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농장에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이 왔어요. 교도소에 계셨던 분들도 오셨고요.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생명의 공간이었어요.”
후계농으로서의 역할에 고민하던 두현 씨에게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네덜란드의 치유농장 같은 농장을 한국에 여는 것. 두현 씨는 지금 고향인 산청에서 부모님과 함께 딸기농사를 짓고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해보겠다는 꿈이 생겼어요. 네덜란드의 ‘케어팜’처럼 농촌을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마음이 지친 이들이 텃밭을 가꾸고 흙을 밟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누구나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농촌을 꾸려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꿈을 찾은 것은 두현 씨 뿐만이 아니다. 여행을 주도했던 지황 씨는 청년 농부들을 위한 이동식 농촌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땅과 집이 없는 청년들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하석 씨는 ‘바른 먹거리’에 대한 고민 끝에 아이쿱 생협 ‘자연드림’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파머스마켓을 보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결 고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프랑스 사과농장에서 탱크를 망가뜨리고 농장을 떠날 때 저희가 사고만 치고 갑니다라고 소심하게 사과를 했어요. 그러니까 농장주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일하지 않는 사람은 망가뜨리지도 않는다고. 저희는 그 말을 믿고 계속 갈 겁니다.”(지황 씨)
영화 속 세 청년은 따뜻해진 마음으로 농장을 나오지만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차가운 빗방울이다. 이들은 고민을 하나씩 터놓는다. ‘한국에 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농사를 짓겠다는 나와 결혼할 사람이 있을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농사를 시작할 수 있을까.’
영화 마지막은 추수 장면. 첫 장면에서 모내기를 했던 바로 그 논이다. 청년 셋의 얼굴은 첫 장면보다 부쩍 그을렸고, 표정은 조금 더 편해 보인다. 이들의 진짜 여정이 시작됐다.
FARM 고은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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