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의 주요 판단 근거
이론과 다르게 움직여
경제학자들 고민 깊어져
[ 이상은 기자 ] 경제학 교과서는 오랫동안 실업률이 오르면 물가가 떨어지고, 실업률이 떨어질 때는 물가가 오른다는 내용의 필립스 곡선을 정설로 가르쳐 왔다. 주요 중앙은행들은 대부분 이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고용지표와 물가상승률을 통화정책의 주요 판단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학계와 금융가에서는 필립스 곡선이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중이다. 단적인 예가 미국 실업률이다. 2009년에는 10%를 넘었던 미국 실업률은 최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추정하는 자연실업률 아래인 4.3%까지 떨어졌다. 한데 이 기간 물가상승률은 거의 1~2%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필립스 곡선이 누웠다(실업률이 떨어져도 물가가 안 오른다)’고 하는 이유다. 이러다간 필립스 가로선이 될 판이다.
이런 가운데 필립스 곡선의 신봉자인 재닛 옐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면서 미래 물가 상승에 대비하는 ‘선제적 조치’라고 밝혔다. 실업률이 이처럼 떨어졌으니 오랫동안 묶여있던 물가도 곧 오를 테고,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다. Fed가 양적 긴축 신호까지 보내면서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 중앙은행(BOE), 캐나다 중앙은행(BOC) 등도 잇달아 긴축 기조로 돌아서고 있다.
필립스 곡선이 누운 지는 꽤 됐지만, 이것이 Fed의 양적 긴축으로 대표되는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선회까지 불러오자 필립스 곡선을 차라리 거론하지 말자는 주장도 거세지고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달 옐런 의장의 선제적 조치를 비판하며 물가가 본격적으로 오를 기미가 있을 때 중앙은행이 대응하는 쪽이 낫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필립스 곡선이 왜 누웠는지 그게 알쏭달쏭하다는 점이다. 일본 중앙은행(BOJ)은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서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예측가능해지면서 기대인플레이션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물가에 영향을 줄 만큼 실업률이 충분히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셋째는 세계화 등으로 시장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원인을 무엇으로 꼽느냐에 따라 처방전도 달라진다. 첫째가 원인이라면 중앙은행이 물가상승률을 정책 목표로 삼는 것의 신뢰도가 좀 떨어지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일이다. 둘째가 원인이라면 그냥 기다리면 된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실업률이 4% 아래로 떨어졌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1965년 11월 물가상승률은 1.4%(전년 동기 대비)였는데 1년 후 3.2%가 됐고 1970년까지 5% 수준으로 치솟았다. 옐런 의장이 금리를 ‘선제적으로’ 올리자고 할 때 염두에 두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셋째가 원인이라면 골치가 아파진다. 중앙은행, 나아가 개별 국가가 이 문제에 손을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게 왜 나쁘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이 떨어질 때 ‘임금이 올라서’ 물가가 오른다는 이론이다. 이 곡선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달리 보면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는 뜻이고, 더 나쁘게 상황을 본다면 ‘좋은 일자리’가 안 생긴다는 얘기다. 세계화로 인해 저임금 국가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동화 등으로 로봇에 일자리를 빼앗긴 결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개별 국가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BOJ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시적인 요인의 영향도 존재한다. 2014년 하반기부터 지속된 유가 등 에너지 가격 하락과 지난해 미국 통신사들의 데이터 통신료 인하 등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지난 1년간 이런 요인이 없었다면 미국 물가상승률이 0.2%포인트 더 높아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필립스 곡선이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관점에선 아직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분명해질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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