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추계 불명확하면 국정과제 공감 못 얻어
'증세 없는 공약 이행' 경기 살려내면 가능
정부 여당이 동시에 ‘증세론’을 제기했다. 문재인 대통령 주재의 ‘100대 국정과제 보고회의’ 때 증세 없이 추진하겠다던 재정계획이 나온 지 하루 만이다. 5년(2018~2022년 지출)간 추가로 필요하다는 178조원의 정확성과 타당성, 조달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공개 논의가 불가피해졌다.
당초 국정과제 보고대회 때 발표된 재원확보 방안에는 증세안이 명백히 배제됐었다. 세수(稅收) 자연증가분 60조5000억원, 재정지출 절감 95조원, 정부 여유자금 활용 35조원 등으로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경기를 살려 세금이 늘어나게 하면서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정석 행정’을 표방했다. 100가지 정책 과제들은 다양한 논쟁과 논란도 예고했지만, 적어도 ‘증세 없는 공약 이행’이라는 측면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다음날 여당 대표가 증세론을 들고나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과표대상 2000억원 이상 대기업 법인세율을 22%에서 25%로, 5억원 초과 소득세율은 40%에서 42%로 올리자”고 말했다. 대통령 주재의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세목과 세율 인상폭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한 점이 심상찮다. 4선 국회의원인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도 소득세를 거론하며 증세론에 가세했다. ‘경제관계장관회의’ 참석자 18명 중 5명이 김 장관의 ‘증세불가피론’에 동조했다. 증세론이 가을 정기국회의 큰 이슈가 될 전망이다.
급작스런 증세론에는 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증세 없는 국정과제 이행’ 발표가 뒷전으로 밀리는 분위기가 유감스럽다. 투자·소비를 활성화해 고용과 성장률을 높이면 그 정도 세수 확충은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 경제가 좋아지면 소득·법인·부가가치세 등 소위 3대 대형 세목부터 확 늘어나니 바른 방향이다. 규제완화를 통해 투자활성화만 된다면 달성이 가능하다. 60조원 지출 절감도 해볼만 한 목표치다. 증세 여부와 별개로 밀어붙여야 할 사안이다.
증세론은 세계적 감세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특히 법인세는 최근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이 투자활성화 차원에서 큰 폭의 감세에 나설 정도로 국제경쟁력 지표처럼 된 세목이다. ‘5억원 초과 중과세(40%)’가 올해 처음 시행되는 소득세율이 또 올라간다면 조세저항이 우려된다. 더구나 근로소득자의 46.8%(810만 명)가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상황은 정부 여당의 누구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 ‘넓은 세원, 낮은 세율’ ‘국민개세주의’라는 일반 원리와 맞지 않는다.
재원문제를 좀 더 솔직히 하자는 취지라면 진일보한 증세론이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경제민주화, 대기업 개혁’ 기조가 100대 과제에 명확히 포함돼 있는 데다 탈(脫)원전과 일련의 고용정책 등 그간의 행보를 볼 때 “수십조원의 세수 추가 확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건 분명히 장밋빛 전망이다. “증세 문제를 정직하게 얘기하고 국민토론을 요청하자”는 김 장관의 언급이 차라리 진솔하게 들리는 이유다.
정책 추진 의지는 강하면서도 돈문제에서는 감추려는 게 관료행정의 전통이다. ‘정치’가 작용하고 국회가 압박하면 예외가 없다. 추경안에 포함된 공무원 증원계획이 그렇다. 항목에는 80억원으로 잡혔지만 채용에 따른 행정 비용일 뿐이다. 늘어나는 1만2000명 유지에 매년 들어갈 비용은 계산도 잘 안 된다.
앞서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5년간 추가 채용하겠다는 17만4000명 공무원 유지에 16조8000억원이 든다고 밝혔지만 국회예산처 계산으로는 28조5000억원이다. 국정기획위는 8조2000억원이라고 했다가 논란이 커지자 “국가직만 계산한 것”이라며 하룻새 내놓은 게 그 금액이다. 국정과제 예산 178조원도 줄여잡은 수치일 공산이 매우 크다. 소요 예산에 대한 전문가들의 검증과 사회적 공론이 필요한 이유다.
고무줄식 재원 셈법과 불확실한 재원계획은 국민의 의혹과 불만을 키우게 된다. 지금의 증세론이 일견 솔직한 고백처럼 비칠 수 있지만 본질은 행정편의적이며,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청와대 부담을 덜고 재원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서로 교감된 여당발(發) 증세론이라면 이런 중차대한 과제에는 어울리지 않는 꼼수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 100대 과제에 대한 단기·중장기 계산서를 하나하나 내놓고 국민적 동의를 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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