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안전하고 최고 경쟁력의 수출산업이기도
쫓기듯 하는 탈원전은 어리석은 일
에너지 정책은 상식선에서 판단할 일 아니다"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경제학 >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는 라틴어 금언이다. 어린 시절에 익힌 이 한마디를 지금 새삼 떠올리게 한 것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펼쳐지고 있는 정부의 각종 정책이다. 분명 정책 과제 가운데는 ‘전격전(blitzkrieg)’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충격을 한정할 수 있고, 폐해가 확인됐지만 관성이나 기득권에 의해 지속되는 정책이라면 전광석화처럼 갈아 치우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할 세력들이 결집할 시간을 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이 일파만파로 사방에 미칠 수 있는 정책이라면 속도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과 이에 따른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결정 같은 게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탈원전은 국가에너지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에너지는 산업을 움직이고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역사적으로 국력을 완전히 재편한 산업혁명도 기실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에서 시작됐다. 이처럼 에너지 정책의 변화는 국가 명운을 좌우한다. 이런 점에서 에너지 정책은 한 사람의 선언과 몇 사람의 의논으로 간단하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현재 가장 싼 전기를 생산하는 건 원자력 발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반대가 끊이지 않는 것은 안전성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수백 기의 원전이 가동돼 왔지만 중대한 사고는 미국의 스리마일섬,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그리고 일본의 후쿠시마 등 세 건이다. 이렇게 보면 피해가 크고 광범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원전 사고로 피해를 입을 확률은 자동차 사고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다. 게다가 이들 사고는 다른 지질학적 조건 하에서 다른 수준의 기술로 건설된 원전에서 일어났다.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우리 원전 기술을 감안하면 사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따라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밀한 연구를 하는 일이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탈원전 여부를 결정할 때도 고려할 사항이 많이 있다. 첫째는 탈원전 대안의 실현 가능성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우리 국토 면적이나 기상 등을 감안할 때 발전량을 조금은 늘릴 수 있겠지만 원전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도 비용 문제가 있다. 지금도 우리는 중동지역으로부터 이른바 ‘아시아 프리미엄’ 때문에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에 비해 비싼 가격으로 LNG를 수입하고 있다. 한국이 LNG 발전으로 전환하면 가격이 폭등할 개연성이 크다. 러시아산 LNG는 조금 싸지만 열량이 낮아 비싼 프로판을 섞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비용이 올라간다.
둘째는 타 산업에 미칠 영향이다. 원자력산업은 연계 효과가 큰 산업이다. 탈원전으로 상승할 에너지 비용을 차치하더라도 일부 관련 산업은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지난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기업인 회동에서 두산그룹 회장이 에둘러 표현했듯이 원전에 사용되는 기기나 부품을 공급하는 정밀기계산업은 큰 영향을 받을 게 뻔하다. 대기업만이 아니다. 현 정부가 보호하려고 하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셋째는 사장될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기술과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과 추가 계약으로 한국은 건설과 운영을 합쳐 약 76조원의 매출이 예상된다. 이는 자동차 320만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액수다. 탈원전으로 돌아서면 이 같은 수출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 정책이 실패한 경우를 보면 대개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본 데서 비롯한다. 이런 결과를 피하려면 관련된 쟁점들을 다각도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탈원전 정책도 원전의 안전성, 대안의 실현 가능성, 경제적 손익,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신고리 5·6호기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가 3개월 안에 사실상 여론조사를 통해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게 돼 있다. 에너지 정책은 상식선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설사 탈원전으로 가더라도 좀 더 천천히 서두를 필요가 있다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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